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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明) 5

미생(未生) 2015. 6. 15. 00:18

자줏빛 생견당련이 청사초롱 사이로 비틀거린다. 붉은 갓을 쓴 기러기아비는 느릿하게 길을 잡는다. 새신랑을 태운 흰말의 고삐를 단단하게 틀어 쥔 노비의 손위로 붉은 달빛이 스러진다. 벼 심을 논배미 하나 없는 이들 목숨 연명할 패랭이 꽃이 메마른 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새신부가 산다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중늙은이가 노점으로 안내한다.



저치가 앉은뱅이 아씨 새신랑인가 보지? 대감집 여식이면 뭐 할 것인가, 병신인데. 하이고, 신랑 인물이 아깝네, 아까워. 그럴 게 있나. 저 인사도 장참판댁 천한 종년 배에서 나왔다지. 글쎄 그 요망한 년이 자진하면서 주인 양반 양물을 꽉 틀어 쥐어서 후사가 없다지 않은가. 에구구, 어쩐지 뭔 사내 낯짝이 사람 홀릴 것처럼 생겼더라니 제 어미랑 똑같구먼. 염병할, 그 방정맞은 주둥아리 닥치지 못할까. 카악. 퉷.



이보시오, 이것도 좀 들면서 마시오. 아이고, 이제보니 새 신랑 싣고 온 이 아니오. 새신랑이나 그쪽이나 인물들이 훤하구려. 자자, 저치들 이야기는 신경 쓰지 말고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일이 고된가 보오. 말도 없이 무슨 술을 그리 자시오. 아이고, 사립문도 닫아야 하는데 어딜 데리고 가시오. 급하기도 하시지, 그래도 거기는 새신랑 머무는 방 아니오. 저 쪽에 빈방이 있으니 그 쪽으로, 아이고. 그리 갑시다. 이녁 힘을 어찌 당하오. 사내들이란 그리 무작정 달려드면 되는 줄 알지. 계집을 품어본 적이 없는가 보오. 자, 여기를 살살.



에구머니나, 뉘시오. 그만. 제발 그만. 넌 이만 여기서 나가거라.



이게 뭐하는 짓이냐. 사내가 계집 안는데 꼭 뜻이 있어야 합니까. 벗은 어깨에 붉은 잇자국이 선명하다. 백기야,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눅눅하니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구슬피 울려퍼진다. 도련님, 이 혼인 꼭 하셔야 겠습니까. 순간 갑작스럽게 웃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눈꼬리에 눈물마저 매단 채 허리를 접어가며 웃어댄다. 백기야, 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네 눈에도 내가 우습더냐. 왜 너도 밖에서 떠드는 소리 다 듣지 않았더냐. 대감댁 앉은뱅이 아씨한테 팔려가는 근본 없는 종년 자식. 도련님, 그런 치들이 떠드는 소리는. 백기야. 나는 강해질 것이다. 아버님의 돈이든, 앉은뱅이 아씨의 권세든 다 가질 것이다. 누구도 다시는 어머니의 이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강해질 것이다.



도련님, 제가 돕겠습니다. 그러니 이 혼사는 없던 걸로 합시다. 차게 가라앉은 두 눈이 무연히 쳐다본다. 네가 무엇인데. 도련님. 너 따위가 무슨 힘이 있어 날 돕겠다는 것이냐. 내일 하루도 길 것이야. 그만 자거라.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팔을 다급하게 끌어당긴다. 백기야, 너는, 너만은 내 뜻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다. 도련님, 지금 이 방을 나서면 우리 사이의 정리는 없어지는 것이오. 너와 내가 끊는다고 끊어질 사이였더나. 힘을 잃은 두 팔이 아래로 툭 떨어진다. 홀로 남은 빈 방에 헛웃음만 맴돈다. 



한차례 비라도 쏟아질 요량인지 늦은 오후까지 먹구름이 낮게 가라 앉았다. 신랑이 장모될 이에게 기러기를 건네자 수모가 신부를 업고 초례청으로 나온다. 살갗이 윤택하고 어깨는 둥글고 한삼 사이로 비치는 손이 봄에 돋아나는 죽순과 같은 것이 자식을 여럿 두고 부귀 영화를 누릴 상이건만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한다.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곁에 앉은 수모의 도움으로 새신부가 수줍게 두 번 절하고 새신랑이 한 번 절한다.



농을 건네는 구경꾼 하나 없는 초례청은 예식의 순서를 봉독하는 이의 목소리만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술잔을 서로 바꿔 마시고 젓가락으로 신랑이 안주를 집어주는데 신부의 뒤틀린 입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붉은 원삼 위로 툭 떨어진다. 신부가 부끄러움에 짐승이 우는 듯한 괴이쩍인 소리를 내며 양 손을 뒤트는데 그 모든 것을 선연히 지켜보자니 민망함에 서둘러 다음 순서로 봉독한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합환주로 길숨해진 눈매 아래 그리움이 사무친다. 여덟 폭 병풍 들어다가 문 앞에 칠 생각도 않고 잦바듬히 비틀걸음으로 새신부에게 다가간다. 화관을 벗기고 양팔을 감싼 보옥대를 빼고 맵시 좋은 버선 뒤꿈치를 잡아 당긴다. 옷고름이 풀리고 저고리가 아래로 내려온다. 그제서야 검푸른 이끼가 내려 앉은 섬돌에 기대어 앉아 있던 기다란 인영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누이를 잘 부탁하네. 제게 하실 말씀은 아닌 듯 합니다만. 저리도 모자란 누이의 오라비라지만 저 친구의 마음을 쥐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그것 하나 모를까. 당신들, 그리도 귀하게 났다는 당신이라는 사람들은 참으로.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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