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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明) 4

미생(未生) 2015. 5. 17. 03:33

등 뒤로 따라붙는 그림자가 길어졌다. 화륜거 바퀴 달리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맺힌 듯 얼얼하나 더 이상 발걸음을 늦출 수 없다. 품 안에 든 종이가 묵직하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이 땅에서 씨를 뿌리고 살아왔는데 왜놈 따위에게 무슨 신고요 보릿짚 말리우고 고춧모도 심고 약쑥도 베어야 하는데 축지법을 쓰는 것도 아니고 거기까지 못가겠소. 큰어르신은 관에서 정한 기한 내에 책임지고 토지 신고를 마치라는 분부를 백기에게 직접 내렸다. 방대한 장참판댁 전답과 임야의 급을 세세하게 나누고 지적과 결수를 세고 결당 몇 석을 거두어들이는지 세밀하게 헤아렸다.  
 


상모를 멋드러지게 돌리던 막동이는 이제껏 우리 것이었는데 어째서 이제 내것이 아니라니, 나라 없는 백성 하소연 할 길 없어 볼썽사납게 내뒹구는 표목을 붙잡고 나앉았다가 얼어죽은 시체로 산을 이룬다는 머나먼 간도로 떠났다. 귀촉도 불여귀야 너도 울고 나도 울어 순한 안해 얻어 함께 둔전을 일구겠다던 덕만은 못살겠다 경성으로 갔다더니 다리 아래 움막 짓고 양어깨 내려앉도록 물지게를 지고 산단다.



토지매매와 관련된 일은 물론 장참판댁 크고 작은 일들이 저의 손을 거치게 되었다. 전답을 사들이고 수인을 하려는데 무당 아들에 종놈이라 이름은 있는데 성이 없어 황망했다. 그럼 장참판댁에서 왔으니 장가로 합시다 해서 장백기가 되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남이 성까지 붙여 저를 부르는데 탁주를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한 듯 했다. 어차피 내 것인 것 하나 없는 세상이건만 지리에 산술에 역법에 글은 익혀 무엇하랴 섧은 것이 가신 듯 했다. 



달포 전 이곳을 떠나 제물포까지 다녀온 것도 상인들의 출입이 잦은 길목에 자리한 포목점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한낮의 푹푹 찌는 더위에 극악스럽게 달라붙었던 셔츠 사이로 기분좋게 시원한 바람이 스며든다. 달포였다. 이미 자시를 훌쩍 넘긴 터라 깨어있을리 만무하건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다시 재촉한다. 이 돌담을 돌아가면 늙은 소나무가 굽이쳐 서 있을 것이고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솟을대문이다. 보지 못한 사이에 키는 얼마나 더 자랐을까. 하루종일 책방에 앉아 또 끼니를 놓치지는 않았을까 마음이 달음박질 한다.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가 참는다. 그새 계절이 바뀌었는지 코 끌으로 올라오는 초목 냄새가 짙어졌다.



입은 무겁고 밤귀 밝은 행랑아범이 문을 열어주며 다녀왔냐 잠기 없는 눈으로 맞는데 팔도에서 몰려든 쉰내에 고린내가 진동하는 장정들과 부대끼며 모로 누워야 했던 객주가 아니라 그리운 이들 있는 내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작은 사랑채로 향하는 중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마당 아래 서서 허리를 깊숙이 접고 고개를 숙인다. 다녀왔습니다, 도련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게 한숨처럼 내뱉어 보지만 왜 이제서야 왔냐고 돌아오는 대꾸는 없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행랑채로 돌아가야 하건만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댓돌 위에 앉아 마루 아래 느슨하게 허리를 기대니 노곤하게 잠이 쏟아진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도련님은 몇 해 전까지도 오줌을 가리지 못했다. 진시가 훌쩍 넘도록 아무 기척이 없어 방문을 여니 이불을 개지도 않고 요 위에 멀뚱히 앉아 있는데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눈물은 그렁그렁 매달고 베개며 서적이며 닥치는대로 집어 던지며 너 따위가 왜 들어왔냐며 악다구니를 써댔다. 이불과 속고의를 빨아줄테니 얼른 내놓으라고 하니 그때서야 비척비척 엉덩이를 일으키는데 눈물 콧물 범벅에 절대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된다고 그랬다가는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버리겠다고 윽박지른다. 어미젖 한번 빨지 못한 채 버려져 함안댁의 축 처진 빈 젖가슴을 조물락대더니 오줌을 가리는 것도 늦었다.



기어코 속고의와 적삼을 내놓지 않으니 요만 둘둘 말아 사당 뒷편 대나무숲을 따라 능선 끄트머리에 있는 계곡으로 향했다. 몸뚱이를 뒤집은 잎사귀들이 요사스럽게 흔들리고 물이 쏟아붓는 사이로 등뒤로 작은 발자국 소리가 따라온다.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 그것이 버티고 있어서. 멀찍이 너른 바위 위에 엉거주춤 앉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적삼을 조물락 거리는데 비트는 것도 아니고 쥐었다 펴락 하는데 손짓이 서름하다. 이리 주십시오. 그런다고 오줌싸개인 것 감추어질 리 없건만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한다.



아직 계곡물이 찹니다, 이리 주시라니까요. 가볍게 손목을 잡아 당기는데 버티지 못하고 작은 몸뚱이가 딸려온다. 잽싸게 뒤통수를 안고 허리를 잡아 채 중심을 잡으려 했건만 그대로 물속으로 자빠지고 말았다. 귀와 눈과 입으로 물이 쏟아진다. 가느다란 팔이 필사적으로 허리끈을 잡아당긴다. 크게 자맥질을 해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도 뜨지 못하고 가쁘게 숨만 내쉬는데 얼굴이 허옇게 핏기가 가시고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있다. 서둘러 물 밖 양지 바른 바위 위로  데리고 나갔다. 도련님, 괜찮습니까. 꺼억 꺼억 마른 기침을 해서 등을 살살 쓸어주니 그제서야 호흡이 고르게 돌아온다. 손발이 차다. 빠르게 양손을 비벼 귀며 볼이며 마른 팔과 다리를 문지르는데 연한 살들이 제 솥뚜겅만한 손바닥에 쓸려 발갛게 달아오르니 애가 탄다.



백기야, 잔기침을 뱉으며 낑낑대면서 자꾸 이름만 불러댄다. 흠뻑 젖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저고리와 바지를 벗어 볕이 잘 드는 곳에 펼쳐 놓았다. 아직도 추위가 가시지 않아 오슬오슬 떠는데 벗은 어깨와 등허리를 끌어다 안았다. 팔 위로 머리를 얹히고 제 온기를 나누어 주고자 바싹 끌어당겼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도련님. 힘없이 늘어진 꼴이 안쓰러워 뒤통수만 쓸어댔다. 둥개 둥개 둥개야 내가 어디서 생겼느냐 아버님의 뼈를 받고 어머님의 살을 빌어 열달 만에 나왔구나. 이내 고른 숨을 뱉고 잠이 든다. 둥개 둥개 둥개야 은을 주면 너를 사고 금을 주면 너를 사랴. 널어놓은 옷가지에서 새물내가 올라온다.



“이제야 왔소. 도련님도 안 계신데 새벽기운 찬 데서 뭐 하시오.”



거칠게 팔을 잡아 흔드는 손에 눈을 뜨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말투가 불퉁하고 요상스럽게 눈끝이 붉다. 아, 안 계셨구나. 등이 배기고 어깨가 쑤시고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 먼 길을 밤새도록 걸어와 주인 없는 방 앞에서 꼴사납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속이 헛헛하다.



“아무리 양반 없는 세상 되었다지만 없는 놈이 있는 놈 되고 천한 것이 귀한 것 가질 수 있겠소.”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쩍 든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선 그깟 셈 하나 못해서 제 땅 다 뺏기는 세상에 갖고자 마음 먹으면 무엇을 못 가질까. 이 집안에 들어와 개처럼 일하면서 단 한 사람, 고작 그것 하나 욕심냈는데.



“도련님 어디 갔는지 아시오?”



잠자리가 바뀌면 그 성정에 더 잠들기가 힘들었을텐데.



“한대감댁 아씨한테 사주단자 넣으러 갔소.”



누구와, 누가 누구와.



“속 끓이지 마소. 나와 혼인합시다.”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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