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무명(無明) 3

미생(未生) 2015. 5. 3. 03:51

행랑채 마당 가운데 가파른 계단을 올라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사랑채 오른쪽으로 난 중문을 지나 긴 담장을 따라가면 산 줄기 아래 닿을 듯 붙어 있는 정자가 나타난다. 구름 한 점 없는 시퍼런 하늘이 널찍한 연못 위에 떠 있고 노송이 굵은 목줄기를 비틀고 내려 앉아 있다. 못안에 자리한 수련이 연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한가운데 흰배롱나무꽃이 긴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



나는 유독 연을 사랑하니, 진흙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아니하고
맑은 물결에 씻기면서도 요망하지 아니하고 속은 통하되 겉은 바르며
넝쿨을 치지도 않고 가지를 뻗지도 않으면서 향기는 멀수록 더 맑아지고
우뚝 맑게 선 모습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때 묻히기는 어려운 까닭이라.


주돈이를 아느냐. 아직 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청년의 미성이 고요한 정원을 가득 채운다. 고집스럽게 등을 돌리고 앉아 저 멀리 계곡을 타고 실려온 산바람으로 흔들거리는 연 이파리 사이로 비치는 바닥 아래 놓인 돌들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무극이면서 태극이요, 태극이 동하면 양이 되고 정하면 음이 된다고 하였지요. 밤낮으로 아버님 꽁무니를 졸졸 쫒아다니더니 제법이구나.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는데 순한 산짐승 같은 눈망울과 이질적으로 붉은 입술 끝만 비틀어 조롱하듯 내뱉는다.


저만치 작은 주인의 뒤를 지키고 서 있던 이제 청년의 태가 완연한 백기는 무슨 뜻이냐는 듯 물끄러미 시선을 맞춘다. 칠년이었다. 작은 주인의 그림자로 살며 한몸처럼 붙어 수발을 들면서 어떤 행동을 할지 무슨 표정을 지을지 내 것인 양 한 치 앞을 정확히 내짚으면서도 점점 저 조그마한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 못에 있는 연을 모조리 뽑거라. 한 송이도 남겨서는 안된다.”


이 집안의 큰 어르신이 가장 아끼는 꽃이다. 실날 같이 붙은 산 목숨 겨우 겨우 이어가고 있는 마님이나 있는 듯 없는 듯 죽은 목숨처럼 작은 사랑채에 쳐박혀 채 피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자신의 작은 주인이나 살붙이들에게는 조금의 곁도 허락치 않는 분이 불면 흩어질라 쥐면 날아갈라 살뜰하게 보살피는 미물들이다. 나무에 묶여 매질 당하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으나 다만, 다만 염려되는 것은. 여기 나 있다고 그렇게 소리 없이 외쳐도 그분이 계속 돌아보지 않는다면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소매와 바짓 가랑이를 걷고 못으로 걸어 들어간다. 발 아래 닿는 돌의 서늘한 감촉이 섬뜩하다. 손톱으로 진흙을 긁어 뿌리를 훑어내는데 갑자기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감겨온다. 너는 꼭 이렇게, 내가 더 미치는 꼴을 보고 싶은 거지. 어릴 때처럼 어깨를 안아 올리고 모두 괜찮아질 것이라고 달래 주고 싶은데 잔뜩 흙투성이인 손이 부끄럽다.





긴 칼 옆에 차고 길 가는 이 머리채 잡아다 무릎 꿇리고 싹둑 잘라내는데 잘리기 전에 내가 먼저 잘라냈지. 그깟 터럭 하나로 지켜질 자긍심과 긍지라니. 대나무 사이로 스치는 바람이 귓가를 지나쳐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왔다. 망건이 탕건되는 세상이라더니 저 꼴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입안에 머금은 차가 떫다. 덕수궁 앞뜰에서 기생이 노래하고 춤을 추고 악공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고 고기는 산처럼 쌓아 놓고 포는 숲처럼 준비하고 술은 샘처럼 많아 잔치를 즐겼지. 다 위대한 왕의 은혜 덕분이었지. 대한이 천하를 소유하고 무에 빛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대인가.



다관에 우린 찻물을 찻잔에 나눠 따르는 소리가 적막함을 메꾼다. 처지도 모르고 분별 없이 날뛰던 개화의 죄인들과 모자란 개화의 원수들이 그 아사리판을 벌이는 동안 도성은 왜놈들에 아라사 놈들 천지가 됐어. 손에 쥔 것 놓지 않겠다고 욕심은 모가지까지 차서 간악한 세치 혀로 백성들 눈 돌리고 입 틀어쥐고 여기까지 용케 버티고 온 거지 별 수가 있습니까. 만석꾼 아드님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건청궁 담이 낮아 그 참변이 났습니까. 어디, 쳐들어와서 빼앗을테면 해보라지요.


하, 이거 이 좁은 담장 안에 갇혀 있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란 말이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허리까지 접어가며 웃다가 문득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듯 낯짝을 가깝게 들이댄다. 요지경 세상이라 이 댁 어르신도 여기저기 줄을 대느라 바쁘시다지.
다 넋 빠진 나랏님 덕에 조선땅이 야금야금 먹히는 판국에 곳간은 누가 챙길 것인가. 이 집안에 딸린 식솔만 수십이다.

 

 

장참판댁에 힘 좋고 영리한 업이 들어왔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 자네가 부리던 종놈 있지 않은가, 그 녀석을 수족처럼 달고 다닌 다지. 묻는 말투는 한 없이 가벼운데 이미 웃음기가 가신 눈이 번연히 답을 기다린다. 쓸만한 녀석이지요. 차 빛깔이 탁하다. 감히 누구 것을 넘 봐. 내 무간지옥까지 뒤따라가 살가죽을 바르고 피를 말려 버릴테다.

마당 안쪽까지 깊게 내려 앉은 지는 해에 흰 손모가지가 붉게 물든다. 참으로 요상타 말이지, 한양의 천연하고 아름답기로 이름난 명월이가 자네보다 더 야들야들하니 고울까. 농인지 승강을 하려는 것인지 말을 해도 꼭 저 따위로, 슬금슬금 지분거리는 손을 내치려는데,



쾅.



아버님 따라 신새벽에 선산에 따라간 녀석이 잘도 이제서야. 송구합니다, 손이 미끄러져서.


 

무명(無明):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된다.

Posted by 흰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