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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明) 8

미생(未生) 2015.11.03 01:55

호방한 웃음을 날리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총독부 사무관은 경성에 있는 정미소를 합자할 것을 은근하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음험한 총독부 사무관을 응대하는 백기도 노회한 장사꾼이었다. 토지매매와 등기에 관한 유리한 정보를 주었다더니 쉬운 것은 없었다. 턱 없이 낮은 가격에 쌀을 팔라하고 상당한 부담의 세금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정미소의 운영이 가능한 데다가 또 다른 공장을 세우기 위해서는 일개 사무관이라 할지라도 총독부와의 연줄이 필요했다.


백기 옆에 앉은 목까지 희게 회칠을 한 기생이 술잔을 따르며 은근하게 젖가슴을 팔꿈치에 누른다.

 

"이번에 성혼하셨다지요. 한 잔 받으시지요."

 

술잔을 건네는 사무관의 손가락이 손끝에 닿았다. 목으로 넘어가는 술 끝 맛이 떫다.

 

"밤이 깊었습니다. 이만 일어나시지요."


지금껏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찬기운이 도는 목소리에 짐짓 서운해진다. 기다리지도 않고 방문을 열고 나서더니 길을 앞장선다. 들쩍지근한 술냄새와 텁텁한 분냄새를 더 이상 맡지 않아도 되니 머리가 한결 개운하다.


아직 발에 익지 않은 구두 뒤축에 발꿈치가 벗겨져 쓰라리다. 저만치 앞장서 휘적휘적 걷더니 길 끝에 자리한 가게에 멈추어 선다. 이 길목은 주로 기생을 상대하는 곳인지 값비싼 분이나 비단 목도리와 같은 사치품을 주로 파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기모노를 입은 여점원의 말에 백기는 고개를 앞뒤로 천천히 주억거린다. 계산을 치르고 가게를 나오더니 이제왔냐는 듯 무심하게 쳐다본다. 처음 와 본 거리, 의뭉스레 사무관의 비위를 맞추던 백기, 기생의 젖냄새가 뒤섞여 어지럽다. 모든 것이 낯설다.


이미 혼기를 훌쩍 넘은 백기에게 들어오는 혼담은 많았다. 그런데 그 상대가 하필 영이라니. 아버지를 찾아가 경성가는 길에 함께 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천한 근본은 못 속이지. 그깟 종놈 따위에게. 아버지의 냉담한 조롱과 멸시는 이미 인이 배었다.


싸늘한 밤공기에 한기가 들었다. 내쉬는 숨에 들큼한 술냄새가 끼쳐 올 정도로 바짝 다가섰다. 오르락 내리락 들썩이는 가슴이 보였다. 목울대가 크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 위로 따뜻한 것이 내려 앉는다.

 

 

"경성의 가을은 더 차갑습니다. 몸도 약하신 분이."
  
너는 그렇게 쉽더냐. 귀퉁이만 남은 붉은 초승달이 먹색 하늘에 걸려 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중늙은이의 주정소리와 교태로운 여인의 웃음소리, 인력거가 바닥의 돌을 튕겨내는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앞서가는 구두축이 일정하게 바닥을 차고 울리는 소리만 남았다.  


갑자기 따뜻해진 공기에 노곤해져 잔기침을 하니 불을 더 지펴야겠다고 방을 나선다. 외투를 벗어 개키려는데 주머니가 도톰하다. 손을 집어넣어 꺼내니 목판으로 된 분첩이다. 이것을 고르며 누구를 생각했느냐. 네 머리 속에 손을 담가 휘저어버릴까. 바닥에 내려치자 분첩의 거울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진다.
 


"도련님, 지금 저와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감히 누구 앞이라고. 여태 들어본 적 없는 빈정대는 어투이다. 그깟 분첩 하나 깨진 것이 무슨 대수라고.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진정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묻는 말은 나직하지만 검은 눈동자가 사나운 빛을 발하고 단정한 입매가 뒤틀린다. 이제껏 평온한 얼굴이더니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니 살 것 같다. 그렇지 이런 아사리판에 나만 미쳐 나뛸 순 없지. 영이를 위한 것이냐. 네가 기어코 영이와, 혼인을 하겠다는 것이냐. 

 

 

"제 사람을 들이는 일입니다. 도련님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네 이놈. 멍석말이라도 시켜야지 그 입 다물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떨림을 감추고자 갈라진 유리 조각 하나를 손바닥에 박아 넣었다. 혀를 깨물었는지 비린내에 토기가 치밀었다.


턱이 닿아질 정도로 문정성시를 이루는 곳이라지만 담장 너머 깊숙한 작은 사랑채는 찾는 이 없이 고적했다. 함안댁이 솜을 틀며 섞이는 눈이 침침하네 무릎이 쑤시네 시난고난 앓는 소리, 영이의 버선발이 마루를 스치며 보시락거리는 소리. 마당에 널어 놓은 보리를 고무래로 털며 자박거리는 백기의 소리. 이 소리들이 내가 듣는 모두였다. 이들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죽을 때까지 평생 종살이나 할까요. 문서 없는 종놈입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


체념과 뒤섞인 좌절, 억제된 슬픔은 낯설었다. 갑자기 고개를  떨구더니 패잔병처럼 어깨가 축 늘어진다. 눈동자에는 지독한 고통만이 남았다. 어떤 승리감도 들지 않았다. 굳은 결심이라도 했는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문고리를 움켜 쥔다. 뒷머리가 쭈뼛 섰다.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깊은 밤 온갖 미물들이 머리맡 발치를 뱅뱅거리며 눈알 없는 눈을 희번덕댔다. 떡도 주고 꽃도 줄게 같이 가자. 까무라치는 정신 속에 지린내가 끼쳐왔다. 있을 리 없는 온기를 찾아 사방을 맴돌았다. 제발, 누구라도 제발. 도련님. 아득하게 들려온 너의 목소리. 네가 내 전부였다.

 

 

"도련님처럼 장가도 들고 자식도 낳을 것입니다. 더 이상 관여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눈앞이 흐려져 분명하게 하고자 눈을 계속해서 깜박였다. 너만은 내가 어떤 짓을 저질러도 내 곁에 있어야 하는 것을. 버림받는 것은 시간이 흘러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몸의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섰다. 분명 발소리를 들었을 것임에도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문고리를 움켜쥔 손의 관절이 불끈거렸다. 독이 오른 산짐승을 달래듯 천천히 등 뒤에 손을 올렸다.


 
"가지마. 백기야. 제발, 제발 나를 버리지마."

 

"잊으셨습니까. 저를 먼저 버린 분은 도련님이십니다."

 

또 다시 어둠이다. 발끝에서 미물들이 새까맣게 몰려오더니 발목을 휘감고 몸통을 죄어온다. 나와 같이 가자. 떡도 주고 꽃도 줄게. 긴 강 건너 훨훨 날아가자.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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