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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明) 6

미생(未生) 2015. 7. 23. 01:21

베틀 아래 깔아 둔 솥가마니에서 펄펄 김이 올라온다. 지게문 열어도 습한 바람 한 자락 들지 않았고 잃어버린 제 짝을 부르는 양 북바디 치는 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앉은 자리가 눅진하고 차져 엉덩이를 들썩이는 것조차 거추장스러웠다. 잡힐 듯 흐릿한 어릴 적 고향 마을은 재 너머 습한 바닷 바람이 불어오고 땅이 윤택했다. 그곳에서 난 여인네들은 한평생 태모시를 훑어내고 쪼개고 엮느라 살이 째지고 입술과 혓바닥에도 굳은 살이 베기고 곱은 허리가 펴질 날이 없었다. 달포 동안 쪼개도 한 필이나 될까. 이골이 나서 더 이상 못하겠소 털어버릴라 치면 그 가느다란 실 한올이, 잠자리 날개 마냥 보들보들 감기는 것이 차마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더니 무작스럽게 내리쬐는 볕과 깊은 시름과 한숨이 배인 그 실 한 올이 하늘님이었다.


걷기도 전에 어깨 너머로 곁눈질 해 배운 재주로 무릎과 손바닥이 닳도록 모시를 삼고 풀을 먹이고 볏불을 지폈다. 실을 베틀에 얹게 된 것은 그보다 한참 후였다. 조선팔도 심간 편한 여자 팔자가 몇이나 될까. 모시 째느라 핏물에 짓물러져 푸성귀도 삼키지 못하는 꼴은 면하겠지 싶어 굽이진 산허리를 감아 돌고 돌아 수십 번의 재를 넘어 시집을 갔다. 생선 창자 썩는 내 가실 날 없는 고기잡이도 아니었고 땡볕에 그슬려 새까맣게 쪼그라든 농사꾼도 아닌 나랏님 지키는 군인이었다. 남들보다 머리는 하나 더 우에 놓여 있고 탁한 무명 저고리가 아닌 번쩍번쩍 윤이 나는 관복을 입고 길을 나서면 근방의 여편네들이 일없이 사립문을 여닫았다.


우라질, 종놈 등에 업혀 칼 휘두르는 꼬락서니 하고는. 동무끼리 우애 좋게 지내야지 왜 그러시오. 동무는 무슨, 내 동무들은 진작에 다 쫓겨났소. 본새 없는 것들이 우에 올라서는 다 없애버리지 않았소. 많이 배운 높은 양반들이 하는 일인데 우리한테 해가 가는 일을 하겄소, 그래도 이녁은 버티고 있으니 다행이오. 해가 넘어가도록 녹봉도 받지 못하는데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뭐할 것이오. 그런 말 마소. 눈 뜨고 갈 데 있는 것도 조상님들이 돌봐준 덕분 아니겠소. 허허, 뭔 놈의 날이 사람잡겠구만. 거 자네 시집올 때 어머니가 지어준 저고리 어디 있소. 그게.



일여 년 만에 받은 쌀은 썩었고 모래와 겨가 섞였다. 쌀을 빼돌린 자의 집에 몰려가 불을 질렀다. 이 나라의 어미란 자가 피란길에 나섰다. 저 폭도들을 때려잡으시오 바다 건너 청군이 몰려왔다. 큰 비가 내렸다. 살점이 부서지고 뼈가 허옇게 드러난 몸뚱이들이 세찬 물살에 휩쓸려 고깃떼 마냥 몰려다녔다. 사내의 눈알 하나도 물에 씻겨 남쪽으로 떠내려갔다.


관군을 피해 찾을 길 없는 깊은 산으로 스며들었다. 애꾸눈의 설은 쟁기질은 석삼년을 넘기지 못했다. 구중심처 무정한 나랏님과 바다 건너 쳐들어온 군인을 향해 욕을 무작스럽게 퍼부어대더니 들어줄 이 없건만 비굴하게 용서를 구하였다. 단단한 나무껍질을 많이 먹은 날은 똥구멍이 찢어졌다. 독만 남은 사내 대신 산짐승과 먹이를 두고 다투었다. 악에 받쳐 울고 웃던 사내는 말을 잃었고 안개 자욱한 새벽 홀연히 사라졌다. 사나운 욕설도, 청승맞은 넋두리도 사라진 산은 섬뜩하도록 고요했다.


함안이 고향이라는 사팔뜨기 장돌뱅이 도봇장수와 세간을 정리하고 발길 닿은 곳이 원촌리였다. 강산이 변하도록 태기가 없어 애를 태우더니 이미 길을 떠난 아이 아비에게 소식을 전할 길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밴 장참판댁 여종은 태가 곱고 얌전하더니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했다. 부지불식 어미를 잃은 아이는 차가운 방에서 밤낮으로 울어댔다. 한참을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한쪽 귀퉁이에 버려둔 바느질을 시작하는데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오색 찬연한 실을 향해 팔을 뻗는다. 이 귀하고 값진 실을 손에 얻으려면 얼마나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알기라도 하는 양 포동포동한 손가락에 걸고 눈을 마주치고 방싯 웃는다.


어미의 따순 젖무덤을 만지기도 전에 버림 받은 복 없는 가여운 아이였다. 내 속으로 낳은 새끼보다 더 오랜 시간 젖을 물리고 품에 안아도 내새끼 보러 가볼까 고사리 같은 손을 살살 풀라치면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아나는지 세게 움켜쥐었다. 천한 몸에서 났으니 값진 이부자리에 진귀한 옷을 걸쳐도 사람들의 입방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독한 말에 갇혀 세상을 등진 사내를 알고 있었다. 관복을 벗은 사내가 초라하고 부끄러워 제대로 대거리 조차 해주지 않았던 것이 한이 되었다. 제 짝을 잃고 난 이후의 깊고 지독한 공포를 부디 이 아이는 겪지 않기를 바랐다.   


제법 이름 높은 무당의 아들이라더니 이 집안에 들어오고 나서 깊은 밤 홀로 깨어 오도카니 있다가 험한 곳을 헤매고 다녀 애를 태우던 도련님의 우세스러운 버릇이 잠잠해졌다. 까닭 없는 배앓이도 사라졌고 뒤늦게마나 오줌을 가렸다. 아예 본데없는 천 것은 아니었는지 귀동냥으로 제법 흉내를 내어 도련님 말동무도 되어 주는 눈치였다. 



강하고 뜨거운 기운이라 도련님의 차가운 살을 눌러준다는 것이 마냥 허튼소리는 아니었는지 깨기를 반복하나 옅은 잠이 들기도 하였고 핏기 없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마르면 톡 끊어지는 모시 마냥 손이 타기 어려운 도련님의 의지가지가 되었다. 딸년은 속이 상했겠지만서도 아이들끼리 투닥거리면 항상 도련님 편을 들어주었다. 피붙이에게 한번도 받은 적 없는 살가운 말 한마디 건내는 내편이 되는 것이 저 업의 일이었다.


도련님과 작은 마님 모시옷 지어올린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 업의 옷을 짜게 될 줄이야. 단 한번도 딸년 편인 적이 없던 이였다. 늠름한 헌헌대장부 되어 순사와 대작도 한다지만 복 없는 도련님만 쫒아다니는 저 눈과 귀를 묶을 수야 있겠는가. 딸아, 가여운 내 딸아.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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