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무명(無明) 7

미생(未生) 2015. 10. 28. 22:53

장참판댁 깔담살이가 하는 일은 땔감을 줍거나 소를 맥이는 꼴을 베는 것이었다. 논배미 우거진 수풀 위를 낫으로 한 번 휘적대면 그 아래 똬리를 틀고 앉아 있던 뱀이 쇳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한 아름을 베면 소쿠리에 앉아 칡뿌리를 오물거리던 도련님이 집에 언제 가냐고 묻는다.


소쿠리가 다 차야 가지요 하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볼이 심술사납게 불퉁거리더니 아예 등을 대고 드러 눕는다. 또 한 아름을 베어 소쿠리에 얹으면 이제 집에 가냐고 묻는다. 저렇게 성가시게 보챌 거면 왜 따라오셨을까 낫을 잡아 당기는데 풀 아래 나무 그루터기가 숨어 있었는지 낫에 걸려 왼손 식지 끝이 잘려 댕강거렸다.


내 몸에 저렇게 많은 피가 있었나 맥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뱀에게 새끼라도 잃었을까 귀청을 찢는 새된 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칡잎을 뜯어다가 돌돌 감고 칡뿌리로 질끈 동여 매었다. 몇 밤만 자고 나면 괜찮아지니 그만 우십시오. 검붉게 얼룩진 손을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에 가져가더니 동그랗게 입술을 모으고 입김을 불어넣는다. 내 손이 약손이야. 몸뚱이가 전부인 담살이 주제에 이깟 게 무슨 대수라고 더운 입김이 스치는 손끝이 간지러웠다.     


왼손의 흉터가 못나게 얽혀 갈수록 이러다 중머슴은 하겠지. 면장과 안면을 트고 장참판과 재무부 관리와의 자리를 마련코자 이리저리 쏘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찬기운 들라치면 마른 기침을 해댄다는 큰 아들을 위해 수 해 동안 소나무 뿌리에서 우려낸 송진을 가져다 주자 손사래를 치던 면장은 작은 아들이 자행거를 사달라고 생떼를 부린다고 혼자말처럼 푸념을 늘어 놓았다.


뿌리 내리지 못하고 조선 팔도를 떠도는 부모님 모셔 올 초가삼간 마련할 정도면 되겠지, 큰 소 몇 마리와 놋그릇에 정든 임 찬이슬 맞지 않을 정도면 되겠지. 그 언젠가를 위해 신의주로, 경성으로, 동래를 오가며 잠 잘 곳 먹을 것을 아껴 모아 두었던 푼돈을 꺼내야 했다. 그러나 막연한 그 언젠가는 이제 사라졌다.


이제 성혼도 했는데 언제까지 자네 바지춤만 늘어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이번 경성가는 길에 데리고 가게나. 여름밤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 기척 없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에도 잠을 뒤척이던 분인데 시도 때도 없이 방정맞게 울리는 경적소리는 어떻게 견디려나 싶었건만 자리에 앉자마자 두 눈을 감는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허리와 양어깨를 곧게 펴고 몸을 숙이지 않고 팔을 길게 늘여 찬을 집어드는 것이나, 고개는 앞을 보고 비스듬히 시선만 내린 채 크게 음식을 베어 물고 느릿하게 씹는 것도 여전했다. 


사나운 변덕과 깊은 정을 숨긴 저 고요한 얼굴을 이렇게 마주 대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먼 길 서두르고자 이른 아침 사랑채에 들어서니 문안 인사를 하는 도련님이 보였다. 저러다 또 한소리 듣지는 않을까. 고새를 못 참고 옴지락거리더니 종아리가 저려서 걸을 수가 없구나. 등에 매달려 헛발질을 해대던 도련님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단정하게 무릎을 꿇은 뒷모습을 보니 언제 저렇게 장성하셨을까 대견하면서도 야속했다.


여종 등에 업히는 작은 마님의 푸른 저고리가 올라가자 가만히 내려 정돈하는 손길이 제법 다정했다.


잠든 줄만 알았더니 무릎 위에 말아 쥔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날이 찹니다. 옆의 손을 끌어다 감싸 안았다. 이런 것을 잘도 타고 다녔구나. 길게 숨을 내뱉더니 등을 뒤로 기댄다. 마르고 축축한 손바닥을 쓸어내리자 어깨 위로 고개를 툭 떨어 뜨린다. 제 손이 약손입니다.

Posted by 흰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