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유형 (流刑)

Oz, EmCity/단상 2008. 8. 24. 01:25
CLASSIFICATION : Angst
KEYWORDS : Beecher
DISCLAIMER : They're belong to each other.


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 늙은이는 죽어간다는 어린 손자를 만나기 위해 걸어야 했던
그 길다란 길이 어찌나 암담하고 속이 탔는지 빛이 비추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황망함에 주저 앉았다 한다.

빛이라, 반평의 우리 속에 죄인들을 가둔 그들은 적막한 그 순간에도 빛을 번뜩이며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그 빛은 쉬이 잠이 들지 않은 내 눈을 사납게 쪼아댔다. 이곳의 빛은 늙은이가 경험했다는 타는 듯한 갈증 대신,
버석버석한 살거죽을 파고 들었고 무료했다.


죽어야 할 목숨이 살고, 살았어야 할 목숨이 죽었다며 비죽비죽 울어대던 늙은이는
이듬해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끌어안고 고꾸라졌다.
뱀과 같은 지혜를 가졌던 늙은이는 빛이 들기 전 매립장에 던져졌다.
죽음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고, 죽은 이들은 느릿느릿 이곳을 거닐며 사는 자들을 조롱했다.
그리고 속을 뒤집는 야릇한 속삭임들 속에는 사내의 목소리도 있었다.


좋아 지내던 여인의 배에 칼을 쑤셔 박고 이곳에 왔다는 젊은이는 여인이 숨을 헐떡이며 눈이 뒤집히던 순간,
격렬한 사정을 하는 동시에 여인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고 한다.
사랑을 내뱉는 젊은이의 얼굴은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고, 내 몸을 가르는 순간 여인을 부르며 꺽꺽 울어댔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대상도, 부를 이름도 없던 나는 젊은이의 등을 안고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던가 한참을 뒤척였다.


사방으로 혈기가 뻗치는 젊은이는 어둡고 음습한 곳을 찾아 달려들었고,
정성스레 입맞추며 여인의 목을 조르고 사지를 절단내었다.
여인의 공포와 절망은 피에 굶주린 젊은이와 나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모퉁이에서 젊은이와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사내는 이곳에서 친구의 목을 꺾고,
내 아비를 죽인 어떤 이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사내의 눈은 고요하였다.

밤새도록 내 등뒤에서 짐승처럼 헐떡이던 젊은이는 어느 날인가 뱃거죽을 갈랐다.
찢어진 살덩이와 탁하게 오염된 피는 여인의 회한을 씻을 수 없었다.
내 기름진 몸뚱이는 사내의 울음을 달래기에는 낡고 추레했다.


아들은 잊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아내의 담담한 눈동자는 내 죄를 묻고 벌을 내리겠다며 추상같이 단죄하였다.
아희야, 아비는 네 어미와 동기간을 씹어 삼키고도 허기져, 자식새끼라고 보듬어준 아비를 잡은 후레자식이다.  

아희야, 어찌하여 내 가여운 사내를 알았느냐.
방만한 살기로 휘두른 칼날에 베인 것이 사내였고, 사내의 깊은 정(情)은 내 숨통을 끊어 놓았다.
우리는
음습한 피를 나눈 형제였고, 끊임없이 도려내도 금새 차오르는 시뻘건 아가리를 벌린 환부였다.

아희야,  그 사내는 뙤약볕 아래 녹슨 정직한 살갗을 지녔 더운 피가 돌았다.
아비는 그 사내의 따순 그늘 아래 숨어 주제도 모르고 활개를 치고 다녔다.

아희야, 그것은 나락이었으며 천상이었다. 우리는 사랑을 하였다.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빛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

행복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몰려와

날개를 거두고
꽃피는 나의 가슴에 걸려온 것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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