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뒤늦게 이제서야 <추노>를 보고 있는데 아뿔사, 이게 아쉽다.
왕손이 뒤에 스윽 나타나는 호흡도 칼로 벨 것 같은 황철웅이 절대 멋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다.  대길-송태하-황철웅 이 셋 중에(업복이는 화승총이라 반칙) 누가 제일 셀까 항상 궁금했던지라 화끈하게 세명이 겨루는 모습을 보여줄 때는 정말 고마웠건만 어떻게 제주도에서 황철웅이 그렇게 송태하한테 쉽게 당할 수가 있나. 만년 이인자였다지만 황철웅이 그간 무담씨 인간백정 노릇한 것도 아닌데.
 
황철웅은 왕손이와 최장군을 죽여야 했다. 황철웅의 칼에 하릴없이 수 많은 인물들이 베여 갔지만 이들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이들의 죽음은 단지 언년이만 존재하는 대길에게 세상에 분노할 수 있는 당위성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업복이는 단지 사람답게 살기 위해 박차고 나왔을 뿐인데 얼굴에 낙인을 새겨야 했고 결국 양반을 향해 총을 들었다. 황철웅은 송태하의 그늘에 가려 숨죽여 살았던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서 친구를 쫓고 스승과 수하를 베었다. 송태하는 자신이 바로 세우고자 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제 죽는 것인 줄 알면서도 길을 나섰다. 노비를 잡았다가도 사연이 불쌍해서 다시 풀어주면서도 왜 노비들이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는지, 다시 잡혀간 노비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왜 월악산에서 숨어 살 수 밖에 없는지, 왜 큰놈이가 낫을 들 수 밖에 없었는지 대길은 알아야 했다.

드라마 <다모>는 아버지의 역모죄로 양반에서 다모로 떨어진 채옥을 사이로 기존의 질서 체제를 옹호하는 윤과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장성백의 판이하게 다른 두 가치체계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자신을 피붙이처럼 아껴주는 상관에 대한 마음도 윤의 앞길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남에게 들킬새라 차마 펴보지도 못했던, 희망보다 체념을 먼저 알았던 채옥은 성백의 무리가 있는 산채로 잠입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순응해 왔던 질서체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혼란을 느끼게 된다. 주종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안온하게 살 수 있었던 좌포청과 칼을 들고 길을 만들어 세상을 뒤집고자 하는 산채. 채옥은 세상의 전부라 믿었던 도련님을 잃고 자신을 베고자 했던, 세상을 품고자 했으나 자신의 여인 하나 담지 못했던 성백을 향해 쏟아지는 화살을 스스로 받아냈다. <추노>의 언년이는 어떻게 세상에 설 것인가. 


주인댁 양반 아들을 현혹시켰다는 이유로 누이 언년이가 다른 집으로 팔려가야 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큰놈이는 개아들보다 못한 양반들보다 훨씬 그럴 듯하고 괜찮은 지도자 계층 역할을 한다. 근동에서 명망과 덕성이 높다는 것은 언년의 입을 빌린 것이고 사실 대길이나 천지호 패거리들을 이용하는 좌의정, 송태하의 충직함을 이용하는 먹물 든 새살 까기만 좋아하는 양반들에 비하면 적어도 남의 등은 쳐먹지 않은 듯하니 그래, 양반이다. 큰놈이(노비→상민→양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신분질서 변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 큰놈이가 주인을 베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언년이, 양반댁 도련님 노리개는 싫다고 담대하게 받아치던 기개를 보이던 언년이를 나길 잘못 나서 그렇지 본디 양반처럼 고귀한 태생이다 라고 그림 속의 향기 없는 꽃으로 가두는 것은 이 여인이 참 아깝다. 큰놈이와 언년이의 계층적 역할이 아쉬운 것이 현상유지가 유일한 목적인 노련한 정치가인 좌의정과 대길 무리 사이에서 누구의 목을 틀어쥐든 그들 사이에 자리잡는 연결망이나 노비 세력을 경제적으로 규합할 수 있는 구심적 역할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신분질서와 경제구조는 변화하기 시작했고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노비들은, 업복이는 세상이 변화하고 있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언년이는 대길과 송태하의 가운데에서 이 두 인물이 품고 있는 이상향이 평행선인지, 교차될 수 있는지 설명해 줘야 하는 몹쓸 역할이다. 대길은 언년이를 찾겠다는 집념 하나로 추노꾼이 되었고 송태하는 노비로 전락하였음에도 자신이 양반임을 잊지 않는다. 사실 이 두 인물은 대결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대길은 언년이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아버지께 애원하던 겁 많고, 힘 없는 양반집 도련님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언년이를 찾고 싶을 뿐이다.

송태하는 찾아야 하는 것들이 많다. 주군의 명분을 받들고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 자신이 노비가 되었었고, 지켜주고 싶은 여자가 노비였다는 것도 부정하고 도대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것인지 스스로 청사진도 제시하지 못한다. 자신의 주군이었던 소현세자의 개혁·개방의 급진적인 세계관에도 동조하지 못하지만 명을 받드는 충실한 신하이다. 옳은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보다 큰 일을 위한 것이다며 개혁세력의 내부 분열을 막고자 주저없이 이용 당해준다. 대길은 양반의 개가 되어 노비를 추쇄했다가 불쌍해서 놓아 주기도 하며, 자신은 언년이를 아껴주고 싶었을 뿐인데 왜 큰놈이가 낫을 들 수 밖에 없었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대길은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고, 송태하는 찾아야 할 것이 넘치므로 이 두사람은 애초에 대결이 성립되지 않는다. 우주 질서를 바로 세우는 명분이 아니라 단지 좋은 사람과 평생 같이 살고 싶다는 우직한 집념 하나만 품고 있는 남자한테 무슨 수로 당해 낼 수 있나.


그렇지만 대길은 지랄맞은 세상사 상관없이 언년이와 단 둘이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만 꾸었을 뿐이고, 송태하는 조선의 만백성을 귀히 여긴다면서 김혜원이 아닌 언년이, 노비였던 여자와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란 막연하기만 하다.
대길과 송태하의 칼은 갈 곳을 잃고 제 살을 깎아 먹는 황철웅보다 더 부질없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우리의 역사이니 업복이의 희망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반상의 구분이 없는 세상, 귀하고 천함이 다르지 않는 세상, 가진 자들에게 이용 당하지 않는 세상. 업복이의 꿈은 헛된 신기루다. 그러나 양반이 노비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잘 사는 것이 좋은 세상이라는 것을 업복이는 알았다. 송태하는 옳은 길이 무엇인지 옳은 길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결코 그 길은 지름길로 우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길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과 언년이 살고 있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결코 언년이가 따뜻할 수도, 아프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년이는 여전히 깰 수도, 다시 품을 수도 없는 꿈이다.

언년이가 장터에서 대길을 발견하고 속울음을 삭이는 장면을 보고 쓴 글이라 두서없다. 그 십 년 동안 언년이는 글을 깨치고, 절대 변하지 않는 세상이란 희망없는 무서운 곳이라는 것도 알고, 찬 손도 녹여주고 등도 내어 주던 도련님을 잊고 혼례를 올리라는 말에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대길은 한결같이 가만히 웃고만 있는 작은 계집종만 좇고 있다. 가진 것 없는 대길이 내일을 사는 단 하나의 이유이고, 만백성을 어깨에 짊어진 송태하가 지켜줘야 하는 어엿븐 여자일 뿐 초복이처럼 양반을 노비로 만들겠다는 짓밟힌 울분도 사랑가를 부르는 설화의 솔직함도 주워지지 않은 언년이가 저렇게 우니까 똥도 남이 대신 눠줄 것처럼 화석화 되어버린 언년이가 사람인 줄, 사랑인 줄 알겠더라.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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