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대가리 하나 바꿔 앉혀서는 바라는 세상 쉬이 오지 않고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기억해 주지 않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 방향을 잃은 개혁진영의 자중지란, 쓴소리가 무슨 힘이 있나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쁘다 비겁하게 숨어버린 자들의 서글픔. <추노>는 과거의 틀에 감추어 현재를 읽고 미래를 말한다.
우는 짐승은 쏘는 것이 아니라고 총을 내리고 돌아섰던 업복이에게 보다 큰 일을 위한 것이다, 함께 새끼를 꼬며 내일을 꿈꾸던 동료를 죽이라며 인간이기를 포기하라고 등을 떠미는 아사리판. 왜 아까운 목숨이 스스로 벌집을 내고, 몸을 불살라야만 그제서야 알아듣는 척이라도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지. 우리 역사에 영웅이 있었던가, 그 영웅들이 역사를 움직였던가. 그 영웅들이 역사를 일구도록 시대는 허락했던가. 짓밟히고 뭉개졌던 야만의 시대에 이름 하나 가지지 못했던 업복이들이, 구원해 줄 영웅 하나 바랄 수도 가질 수도 없었던 시대를 움직이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황철웅은 잘난 송태하로 인해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상관도, 뛰어난 제자도, 신의로운 친구도 될 수 없었다. 권세가 좌의정 사돈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게 작아지는 노모와 비열한 좌의정과 협잡한 자신을 더 혐오스럽게 옭아매는 뇌성마비를 앓는 아내. 어심을 헤아리는 능수능란한 정치꾼 좌의정에게 감히 맞설 수 있는 힘도 없다. 황철웅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송태하를 극복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좌의정의 개가 되어 지저분한 뒷처리를 도맡아야 한다는 필요조건이 붙었을 뿐이다. 비극의 시작은 송태하는 성전을 앞둔 십자가를 짊어진 순교자인지라 열등감으로 인해 자기파괴적으로 변모하는 황철웅을 헤아릴 아량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유일한 안식처였던 노모 앞에 설 수도 없어 갈 곳을 잃은 채 망연히 길 한가운데 서 있는 황철웅을 보니, 쫓기는 것이 아니라 찾을 것이 있어 간다는 송태하와 대비되어 아이고, 저 화상 마음이 더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제 의지를 벗어난 칼을 손에 놓게 한 것은 송태하와 어깨를 나란히 한 대길이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대상을 극복해야 할 고난이라고 여기지 않고 저는 더 이상 믿지 않는 그 하잘 것 없는 것 하나 지키고자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대길이 황철웅의 그 지독한 전의를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알아 볼 수 없다, 들리지 않는다 외면하던 아내 앞에서 짐승처럼 통곡하는데 그게 전부인 줄 알았더니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이제 알았으니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삶은 결코 녹록치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