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무명(無明) 2 : 남겨진 아이들

바람이 뒤흔드는 소리에 음전한 서까래가 들썩인다. 뒤주에 갇혀있던 계집종이 엿새 만에 빠져나와 악에 받쳐 목을 매달았다는 사당 뒤편의 대나무들이 서로 엉기면서 내는 소리가 요사스럽다. 머리맡 문살 창호지에 그림자가 지는데 담장 아래 축축 늘어진 노송의 잔가지가 짐승의 대가리인지 갈퀴인지 기괴한 형상을 만들어낸다. 아가, 나와 같이 가지 않으련. 귀 아래 시뻘겋게 찢어진 입이 희게 웃는다. 사납게 뒤척이다가 잠에서 깨어 이불을 말아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다. 혹시 눈치 챌까 숨도 꾹 참고 바들바들 떠는데 기어코 요망한 것이 댓돌 위까지 다가왔다.



“도련님.”



저것은, 저 삿된 것은 꼭 이런 때 불쑥 나타나 이렇게도 사람 마음을.


“도련님은 한양에 가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갔다가 또 오는 사람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요. 사방으로 길이 퍼져 있는데 그 길마다 빼곡히 천 간의 집이 늘어서 있지요. 건시, 석류, 오얏, 복숭아 색색의 과실에 민어, 석어, 도미, 준치 고도어며 조선팔도 귀한 생선들은 다 한양으로 모여들었는지 어찌나 통통하고 기름진지요.”



네 이놈, 그렇게 좋으면 한양에나 가버릴 것이지. 제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느릿느릿 군데 군데 한숨까지 섞어가며 과장하는 꼴에 저 방자한 것이 어디 뭐라고 지껄이는지 한번 들어나보자 몸을 모로 눕히는데 부서진 무릎뼈를 껴안고 방구석에 버티고 있던 귀기 서린 잡것이 눈 끝에 걸린다. 


배꽃 같이 환한 얼굴에 수줍음 많은 계집종 하나가 한없이 가벼운 춘정에 방자해지니 투기로 가슴을 쥐어뜯던 마나님은 그깟 천한년 하나 단속 못하고 매질로 다스려 신성한 사당에 사악한 기운을 불러들였다는 죄없는 밤을 방해하는 건너건너 전해지는 이야기도 잊혀졌다. 네가 그렇게 좋다면야 내 이번에 한양간다는 한대감댁 막내도령에게 부탁해 시전지라도 얻어다 주지. 다짐을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든다.



“그렇게 넓디 넓은 곳에 놓칠새라 어미 치맛자락을 꼭 붙잡았는데 한참을 따라가다 땀이 베어 손바닥을 문지르려고 보니 구멍이 숭숭 뚫려 이제 기우지도 못하는 다 헤진 남색 치마가 아니라 머리에 생선 바구니를 이고 있는 생전 처음 본 노파이지 않겠습니까. 밥벌이도 못하는 빈충이라고 해대더니 기어코 여기다 날 버리고 갔구나 서러워 한참을 울고 있으니 멀리서 짚신 한짝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맨발에 눈물콧물 범벅인 어미가 한달음에 쫓아와 등이고 엉덩이고 사정을 두지 않고 때리는데 그게 전혀 아프지가 않았지요.”



들어줄 이 없는 맺힌 속 풀어내는데 깊은 밤 소쩍새만 구슬프게 울어댄다. 

  
“이미 죽어버린 그것이 무슨 힘이 있어 귀한 도련님을 해치겠습니까. 찬바람 막아줄 담벼락 하나 없는 움막이어도 추운 줄 몰랐습니다. 개 돼지 보다 못한 취급 받아도 부끄러운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자식새끼한테 미안해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할 거면서 손은 놓아버렸답니까."



뒤늦게 가지 끝에만 피를 머금은 꽃잎을 가득 피운 벚나무가 어지럽게 흩날린다.



"그렇게 버려진, 잃어버린 저와 애초에 잃어버릴 것도 가진 적이 없는 도련님과 누가 더 가여울까요. 그러니까 도련님, 저는 말이지요. 저는.”



밤사이 바람이 그렇게 불어대더니 미닫이문을 밀고 밖을 내다보니 처마 밑으로 빗방울이 주루룩 미끄러진다. 혹시 온기가 남아있을까 댓돌 위로 내려앉아 손바닥으로 쓸어보니 야속하게도 서늘한 이슬만 맺혀 있다. 저 아래 물안개에 잠긴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꿈만 같다. 향나무 아래 고개 숙인 할미꽃이 기다란 터럭을 옹송그린다.



“아이고 도련님, 아침 기운이 찹니다. 어찌 저고리도 걸치지 않으시고. 그러다 고뿔 드십니다.”


중문을 벌컥 열어제끼며 방정맞게 새살거리며 잘도 방싯방싯 웃어대는데 이 근방 장정들이 저 헤픈 눈웃음에 속앓이를 한다지. 귀밑머리까지 흐트러짐 없이 올려 붙여 땋은 머리카락을 묶어내린 붉은 댕기가 눈꼴시다.



“네가 떠드는 소리에 정신이 먼저 나가겠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쌀뜨물을 우려낸 대야를 툇마루 위에 기세 좋게 올려놓더니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자갈을 고르고 잡초를 솎아낸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게 딱맞게 덥힌 물에 손을 씻고 얼굴을 닦아내니 기다렸다는듯이 대야를 빼앗듯 들고 가더니 조팝나무 아래 그대로 뿌린다. 사부작 거리며 내리는 비에 저고리가 젖어 속적삼이 내비치는데 저것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도련님, 어르신이 찾…….”


저 눈깔을 파버릴까. 너도 그런 눈빛을 할 줄 알았더냐. 눈 아래가 붉어지더니 턱 아래가 불끈거린다. 자네 낙 중에 으뜸이 무엇인 줄 아는가. 두둥실 구름을 탄 듯, 비에 함박 젖듯 생시인 듯 꿈인 듯 한번 맛 본 즐거움을 잊을 수가 없지. 한대감댁 막내도령이 억지로 눈앞에 들이댔던 춘화도가 어른거렸다. 너도 그렇게 붙어먹고 싶은 게지. 두 다리를 서로 얽고 속살을 헤집고 배를 맞추고. 토기가 치밀었다.


“그렇게 말씀드려도 왜 귀이 여기지 않으십니까.”


초립을 벗더니 입고 있던 창옷을 그대로 뒤집어 내 어깨 위에 둘러 씌운다. 고뿔이 오시려나 목이 간질간질하다.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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