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무명(無明) 1 : 만신의 아들

단단하게 힘을 준 뒤꿈치가 바닥을 내리누르고 장고가락에 맞추어 앞으로 살짝 들어올린 버선코가 그리듯 움직인다. 머리에 쓴 붉은 빗갓이 팔랑개비처럼 돌아간다. 애법 선이 고운 무당이 붉은 치마를 들고 걸립을 한다. 작두를 혀에 대고 놀리더니 볼에 대었다가 팔과 다리에 긋더니 시퍼런 날 위에 올라선다. 굿판을 에워싼 마을 아낙과 조무래기들의 함성이 일제히 터진다. 백기의 옆에 선 도련님이 저도 보고 싶다고 깨금발을 들고 고개를 좌로 우로 비튼다. 백기는 저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 도련님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어깨 위에 무등을 태운다. 이제야 시야가 훤히 트인 도련님이 좋다고 어깨 위에서 허리를 들썩인다.

양옆과 뒤가 높고 험한 산으로 막혀 외지인의 출입이 드문 원촌리 입구의 느티나무를 돌면 탁 트인 너른 들판이 펄쳐지고 모퉁이를 돌면 커다란 솟을대문이 나타난다. 웅장한 솟을대문 뒤로 팔작지붕의 행랑채, 중문채와 사랑채, 사당 99칸의 흑청색 기와가 산중턱을 가득 메우고 있다. 사화를 피해 내려온 선대의 대과에는 참여하지 말라는 유훈을 받들어 수양과 후학양성에 매진하더니 대과제도가 없어진 이후에도 그 유덕을 기려 참판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 동신제에 필요한 제물과 음식을 준비한 것도 장참판댁이었다.


“나비가 노니는 듯 하구나.”


저를 버리고 가더니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무슨 심화를 돋우려는 걸까. 줄이나 탈 것이지 세상을 뒤집어 보겠다고 동학군을 쫒아다녔다는 아비의 서툰 장고자락에도 어미의 치마자락이 물 흐르듯 휘감긴다. 굿판을 벌리지 못할 때면 들로 나가 질경이 달래를 뒤지고 멧싹 눈을 까뒤집고, 산골짝 얼음이 녹은 개울가를 들춰 가재를 찾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 흔한 횟배, 학질 잔병치레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동년배에 비해 손발이 크고 길쭉했다. 이태 전 당신제를 지내러 원촌리에 왔다가 찬이슬 맞지 않고 배는 곯지 않겠지 인심이 후하다는 만석꾼 장참판댁에서 일꾼이나 하라고 내던지듯 버리고 떠났다.

작두 위에 폴싹 주저 앉아 어깨를 으쓱대더니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으고 내리고 발을 곧게 뛰넘는다. 문득 두 팔을 앞으로 내동이친 채 몸을 뒤틀다가 멈추니 그악스럽게 울려대던 쇳소리도 그쳤다. 날아갈 듯 두 손을 모으로 허리를 굽혀 공손히 절을 하는데 선명한 가리매가 애처롭다. 꽹과리 속으로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허벅지가 욱씬 거렸다. 염치도 좋지 눈이 마주칠새라 모질게 발길을 돌렸다.

 
“너 때문에 망가졌잖아.”


굿판에서 얻은 시루떡을 넙죽넙죽 받아먹더니 붉그죽죽한 팥고물을 양 입가에 묻히고 제 손에 꼭 쥔 종이꽃이 망가졌다고 트집을 잡는다. 아니 그렇게 오물딱조물딱 해대는데 성한 게 이상치 또 왜 저러신담. 순하게 생긴 이 도련님은 강팍한 주인 어르신의 성미를 물려 받았는지 무슨 일이든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몇 날 며칠이고 패악을 부렸다가 곡기를 끊는 사나운 심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비조차도 잘 찾지 않은 사랑채에 처박힌 것이 애처럽다가도 한번씩 어깃장을 놓으며 사람을 질리게 했다.


이 근방에서 바느질 재주로는 따라갈 이가 없는 침모 함안댁이 느즈막하게 본 영이는 남의 집 눈치밥 먹는 종년 아니랄까 눈치가 빠르고 어미를 닮아 손끝이 야물었다. 하루는 노란 저고리에 연분홍 옷고름을 달았는데 모든 귀한 것은 자기 것이어야 하는 도련님 눈에 그게 그렇게 눈엣가시였나보다. 도련님은 사내아이라 가져가야 소용이 없다고 달래는데도 땅바닥에 드러누워 사지를 벌벌 떨며 눈을 뒤집어 사람을 기함을 시키더니 기어코 불쌍한 영이 가시나 눈에서까지 눈물을 쏙 빼놓고 말았다.   


“다 와 갑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내 이것보다 더 화려한 꽃을 만들어 드리지요.”


무복을 개고 짚신을 간수하고 굿청을 장식할 꽃을 만드는 일이 달리 지닌 재주가 없는 내가 하는 일이었다. 창호지에 물을 들이고 한 장 한 장 다듬이질을 하고 자르고 붙이고 꽃을 피웠다. 그래도 만신의 새끼라고 목소리 하나는 괜찮았는데 높은 청으로 목을 쥐어짜며 율목을 따라하는 것을 본 어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접신을 할 때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야 이 잡놈아. 따라할 게 따로 있지. 머리채를 끌고 들어간 어미는 시뻘겋게 담근 인두를 들고 허벅지를 담금질 했다. 


“네 눈에는 그 무당이 곱더냐, 영이가 곱더냐.”


논바닥에는 달집을 짓고 난 생솔가지와 대나무가 너부러져 있다. 이렇게도 길이 길었던가. 얌전하게 잘 따라가더니 또 무슨 억지를 부리시려고 이러실까. 이 근방에 꽃처럼 해사하고 해처럼 빛나는 분이 도련님 밖에 더 있으십니까. 그제서야 해실해실 웃는다. 영이는 고개짓을 하면 달도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어버린다지요. 소쿠리에 숨긴 찰밥 한 그릇을 건내던 영이의 손톱 끝에 봉숭아 물이 연하게 남아 있었다.


“노비 문서 태우고 주인 양반 주리를 틀고 곤장을 때려도 우리가 가진 게 뭐가 있소.”


굿판의 마지막 날이다. 그렇게 무작스럽게 버리고 갈 때는 언제고 왜 왔소. 새끼나 꼴 것이지 불온한 말들이 오가는 행랑채를 벗어나 방구석으로 들어왔지만 쉬이 눈이 감기지 않는다. 잘 돌아갔을까. 팔뚝을 기어다니는 빈대를 잡아 납작하게 눌렀다.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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