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길 없는 길

길 없는 길

미생(未生) 2015. 4. 6. 01:14

대학교에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최루탄 냄새가 익숙해졌다. 진리 탐구가 이루어져야 할 교정은 수업을 거부하는 강의실, 허수아비를 세워 놓고 화염병 투척 연습을 하는 이들, 옥상에서 외마디 절규를 외치다가 머리채가 붙잡혀 형사 손에 이끌려가는 이들로 어수선했다. 시위의 선봉에 섰다가 제적을 당하거나 구속되거나 강제징집되는 선배들이 유난히 많은 과였다. 상주하는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허옇게 변한 잔디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강촌 민박집에서 관악산 숲길에서 봉천동 허름한 술집에서 소주와 막걸리, 시어 빠진 김치와 빈대떡을 사이에 두고 부어라 마셔라 종내는 주먹질로 마무리 되는 시국토론이 이어졌다. 입에 붙지 않은 호메로스와 국가론을 주워 삼킨대로 내뱉었다.



도서관으로 기어 들어가 비겁하게 침묵하지 않았지만 선두에 설 수도 없었다. 간과할 수 없는 모순과 혼돈으로 가득하지만 언젠가는 끝날 히스테리아였다. 그리고 내 끝이 차가운 철창 안에서 세월을 낚으며, 이유도 없이 군대로 끌려가 개죽음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 될 수는 없었다. 적당한 의분으로 몇 번 구호를 외치고 가리방을 등사기에 롤러로 밀었다. 이 시대의 고난에 찬 신음이 들리는가.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라고 열심히 자위들 중이지만 과장된 미사여구에 비장미가 흘러 넘친다. 씨발 좆같네. 내가 뱉었나 순간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너를 만났다.   


헤겔의 변증법을 내게 설득시켜봐. 시위대의 깃발을 그리다가 뭐가 심사가 뒤틀렸는지 문득 너는 시비조로 말을 걸어왔다. 조야하고 직설직인 표현을 질색하는 너였다. 장백기는 장그래를 사랑한다. 합리적이었던 장백기는 장그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장백기는 장그래를 사랑하는 그런 병신 같은 장백기를 사랑한다. 미친 새끼. 키들키들 웃는 네 손목을 끌어다가 물감이 묻은 네 손바닥을 정성스럽게 혓바닥으로 핥아 올렸다.     


너와 함께 보는 세상은 충만했다. 뻔한 그림에도 서사가 생겼다. 사스키아와 타투스를 잃은 렘브란트는 아기가 되어 아버지 같은 강인한 손과 어머니 같은 자애로운 손에서 위안을 찾았다. 우리 아버지는 글을 읽지 못해. 어릴 때 집에 책이 많은 녀석이 그렇게 샘이 날 수가 없었어. 하루 종일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 땅바닥에 막대기로 그림 하나 그려놓으면 그래야, 그게 무에냐. 쭈뼛쭈뼛 묻는데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잇고 엮어야 했어. 너의 까만 눈과 물감이 마르지 않은 손을 낳아준 아버지는 평생 남의 집 일만 하다 굽어진 등이 펴질 날이 없다고 했지. 검은 때도 끼지 않고 인도 박히지 않은 힘줄만 도드라진 부드러운 손이 그렇게 낯설어서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고 했지.      


잡혀들어간 누군가는 긴 통나무에 다리와 팔이 묶여 보랏빛으로 멍이 들고 손발톱이 빠진 반병신이 되었다. 골목길에서는 달아나는 다급한 발소리와 뒤쫓는 군화소리가 울러 퍼졌다. 보지마, 듣지마. 지금은 나만 봐.  제발.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네 울음소리를 받아 삼켰다. 네가 느끼는 절망과 가망 없는 희망을 내가 다 삼킬 수 있다면. 


곱디 고운 베옷 입고 꽃신 신고 가는 님아
이승의 짐 훌훌 벗고 고이 가소 정든 님아

사바고해 고통일랑 한강물에 띄우고
지난 날 맺힌 한 바람결에 흩날리고


누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는가. 돌아올 길 없는 초혼가를 부르는 늙은 아비의 염불은 목이 메어 끊어졌다가 다시 흩어질라 또 이어졌다. 눈 뜨고 자식을 잃은 미개한 촌부는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부족한 내 탓이오 피딱지가 앉은 손등으로 깡마른 가슴을 치다가 쿵쿵 머리를 찧는다. 사지가 툭툭 잘라지고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지는 슬픔이라고 했던가. 잠시라도 온전한 정신이 돌아왔던 것이 그렇게 얄궂을 수가 없다. 고작 친구를 하나 잃었을 뿐인 나는 그 참혹함 뒤에 숨어 마음껏 울부짖어도 괜찮았다.



너를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세상인데 그깟 정의가 무슨 소용이며 민주주의가 무슨 좆같은 소리인가. 네 뼈를 깎고 살을 갈아 피를 뿌려도 네가 바라는 세상은 쉬이 오지 않아. 야만의 시대에 들쥐와도 같은 그들은 오늘도 인간백정을 따르지.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너 하나 뿐이었는데. 너와 함께 따순 밥을 지어 먹고 두평 남짓 단칸방에 너와 몸을 누이고 싶었을 뿐인데.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네가 그토록 숭배한 수줍음이 많은 철학자의 말에 따라 너에 대한 나의 마음 표현할 길이 없어 전하지 못했는데, 그게 네가 없는 세상에 홀로 남아 이렇게 한이 될 줄이야.


겁에 질려 너를 밀고한 쥐새끼 같은 하숙집 아들놈 목을 쥐어다 비틀어 버릴까. 감히 네 몸에 손을 댄 개새끼들을 잡아다 족칠까. 아니면, 아니면 그렇게 모질게 내 손을 놓아버린 너를 다시 데려와 같이 구천을 떠돌까. 그래는 이만 보내 주게. 우리가 했던 건 나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 그래가 그랬을 리가 없지. 네가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뛰놀았다는 고향 산천은 이렇게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데. 멀리서 기차가 들어왔다. 먼 훗날 너를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너를. 

Posted by 흰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