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동행 없는 길

동행 없는 길

미생(未生) 2015. 3. 29. 00:59

폴새 해가 떴구만 인나제 뭐하고 자빠졌냐, 아야! 여름 해가 길어지고 아침은 더 일찍 부산스럽게 시작되었다. 한 여름밤의 열기로 미적지근하게 데워진 대자리는 제구실을 못했다. 방문 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에 역정이 묻어났다.


방학했다고 방구석에 퍼질러 자빠졌을 거여? 오늘 멀리서 아부지 손님 온다고 했구만 또 한 귀로 듣고 흘려부렀제. 네 방 소제도 하고, 마당도 쓸 것이지. 요로코롬 게을러서 어따 써먹을까이. 왜 나만 갖고 그래싸. 영이도 있잖어. 호랭이가 물어가다 뱉어먹을 놈, 네 동생 딜꼬 시방 장에 핑 갔다 올 것인게 니는 말 좀 들어야.


며칠 전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의 제자가 이곳에 들른다고 했다. 읍내에 하나 있는 중학교의 선생님인 아버지가 가르친 제자들 중에는 내가 아는 이들도 꽤 있었다.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면서기를 하는 동식이네 외삼촌이 그랬고, 읍내에서 고장난 기계를 고치는 성준 아제가 그랬다. 명절이면 굴비나 과일 상자를 들고 인사치레를 하러 들르기도 하였다. 평소 읍내를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아버지 앞에서는 성준아제도 퉁퉁한 손을 가즈런히 모투고 얌전을 뺀다. 전전날 강둑에서 같은 반 준식이네 막내 이모에게 시시덕거리며 농지거리를 건네던 것을 일러 바칠까 하는 사나운 심보가 근질거렸다. 좀처럼 말이 없는 아버지도 이네들이 찾아온 날에는 당신보다 체구가 커다란 장정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드물게 웃곤 하셨다.


뭔 놈이 시상이 이렇게 요상스럽다냐, 군인이 무담씨 사람을 죽이고 대학생들은 허구헌날 데모나 해쌌고. 니는 딴 생각 말고 공부나 해야. 서울 손님이 온다는 말에 어머니는 불쏘시개를 살피는 나를 방으로 쫓아냈다.


얼마나 우악스럽게 옭아맸는지 소나무 위에서 끌어내리는 것보다 목에 걸린 밧줄을 끌르는 게 더 힘들었다는 은숙이네 막내 삼촌도 아버지의 제자라고 했다. 작년 겨울 은숙이네 어머니가 곗돈을 가지고 도망가는 바람에 어머니는 염빙할 육시랄 개잡년이라고 퍼푸어대다가 이불에 오줌을 지린다는 홀로 남은 은숙이네 할배의 빨래나 찬거리를 위해 덩그라니 휑한 집에 드나들곤 했다. 염빙할 여편네, 즈이 새끼들만 딜꼬 가면 늙은 하나씨는 어쩌라고. 쯧쯧. 


밤 도망 전날, 한 반이었던 은숙이가 불쑥 내게 지우개를 건넸다. 땟국이 낀 새까만 목언저리가 붉은 것이 더욱 꼴사나웠다. 새 것이 분명한 네모난 지우개 귀퉁이에 별과 꽃을 그려넣고 아래에는 '진우에게' 삐뚜름하게 적혀 있었다. 전날 놀이를 하다가 준식이에게 져서 지우개를 뺏긴 것을 보았을까. 내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도 암팡스레 의자를 밀치고 나가버렸다. 다음 날 준식이와 또 내기를 하다가 지우개는 반토막이 나서 빼앗기고 말았다. 


얼굴은 순허게 생긴 놈이 누구를 탁해가꼬 그렇게 무작시러울까이, 남은 사람들은 워쩌크롬 살라고. 어머니의 넋두리를 듣다 집을 빠져 나온 나는 강둑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그 해 장마에 떠내려 온 허옇게 배를 뒤집고 죽은 구렁이가 말라붙은 자리에 앉은 아버지의 손에는 드물게 담배가 들려 있었다. 풀을 먹인 아버지의 하얀 셔츠가 물빛을 받아 번쩍이는 순간, 여름이면 얘들을 잡아 주린 배를 채운다는 물구신이 아버지를 잡아채 가는 것이 아닌가 무서워졌다. 보기 싫은 아버지의 등을 뒤로 하고 집을 향해 힘껏 달음박질을 했다.


맥엄씨 댓바람부터 싸돌아 댕기지 말고, 이따가 아부지 점심 드시러 오시니께 살강에 냉겨 놓은 묵은지 꺼내서 상봐서 같이 묵어. 다라이에 수박하고 외 채워놨은께 더우면 건져 묵고. 영이는 어젯밤에 봉숭아 물을 들이고, 묶인 실이 간지럽다고 밤새 칭얼대더니 대야에 물을 받아 연거푸 손을 씻어낸다. 밤새 비닐에 묶여 있던 손이 보기 싫게 쭈글쭈글해졌고, 손톱 아래까지 시뻘건 것이 아직은 볼썽 사납다. 그래도 제 손에 알록달록한 물을 들인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손을 쥐락펴락 가만 있지를 못한다.


- 들강 달강
엄마는 굿에 가고 아빠는 장에 가서
꽂감 한나 사다가 선반에다 엱어논께
머리 깜은 새앙쥐가 딱딱 갉아 묵고
뻬딱만 남어서 아빠는 뻬딱 잡수고
엄마는 가죽 잡수고 조보이는 몰국 잡수고
할마이는 피 잡수고 언니는 살 잡수고 -

 
욕쟁이 춘배 할멈 옆에서 귀동냥을 했는지 어린 누이의 목소리가 청승맞은 것이 괜한 심퉁이 인다. 장에 간다는 소리에 대야를 부시고 어머니의 몸빼 바지를 잡고 나선다. 서울에서 온다는 손님이 아니라면, 영이와 서로 가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치루었겠지만 장터의 외꾸눈 할배가 튀기는 튀밥을 사오라고 거듭 당부하고 발치께만 노려보았다. 감나무 그늘에 배를 누인 덕구도 아침부터 내리쬐는 볕에 지치는지 느릿하게 눈만 껌뻑거리고 움직이지를 않는다. 시원하게 등목이라도 끼얹었으면 좋겠건만 아버지도 안 계신다.


어머니가 부산하게 끓인 선지국이 식어가도, 평상에 앉아 누이와 강냉이와 감자 한소쿠리를 비워 내도록 서울에서 온다는 손님은 오지 않았다. 모기향에도 극악스럽게 달려드는 모기를 잡다가 제풀에 지쳐 까무룩 잠이 들었다. 문득 멀리서 비릿하면서 개운한 냄새가 끼쳤다. 준식이에게서 빌린 책에서 본 시퍼런 바다가 저런 냄새는 아닐까. 빚을 지고 배를 탔던 누군가를 집어 삼킨 시커먼 아가리의 입냄새가 저러지는 않을까. 아비 없는 후레자식을 잃은 여자가 농약을 먹고 자빠져 죽었다는 마을 저수지보다 더 깊고, 이름 없는 업보다 더 많은 구전을 가진 강에서 나는 냄새가 저런 것은 아닐까. 제 아기인줄 알고 여름이면 여린 아이들의 발목을 감고 서럽게 보챈다는 여자처럼 어디선가 잔떨림이 일었다.


밤새 모기에 물려 벌겋게 달아오른 팔다리를 긁어대며 방문을 열자 마당에 들어서는 아버지가 보였다. 그 뒤로 낯선 인영이 따라온다. 일어났냐. 낯선 손님의 출연에 갑작스러우면서 못난 모습을 보였다는 우새시러움에 뒷머리만 긁어댔다. 여름 내내 들로 산으로 쏘다녀 까맣게 그슬린 나보다 더 새까만 얼굴에 볼썽사납게 볼이 움푹 패이고, 흰자위가 깨끗한 두 눈만 괴이할 정도로 빛나는 키꼴만 커다란 사내였다. 나를 발견하고 비죽 웃는 것이 악다구니를 쓰는 욕쟁이 춘배 할멈보다 더 고약해 보였다.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자 그제서야 서울에서 온다는 손님이 그치인 것을 알았다.
 

방학했다고 밖으로만 댕겨쌌지 말고, 인자 숙제도 하고 예습도 해야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하자 가만히 마뜩찮다는 눈길로 노려보다 걸음을 옮긴다. 서울에서 왔다는 사내는 어머니가 치워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와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가 들어오기도 하고,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모양새였다. 작년 가을에 따서 얼린 홍시를 가져다 주기 위해 방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점점 녹기 시작하여 홍시에 맺힌 이슬을 보니 점방의 빙과보다 달듯 하다. 슬쩍 손바닥을 대어보니 아플 정도로 에이는 서늘함에 아버지만 맛보는 홍시를 먹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매운 손이 떠올라 방문을 열었다.


한여름에 문을 닫아 놓아서인지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쏟아진다. 뒷마당을 향해 나있는 작은 창마저 단단하게 고리가 걸려 있었다. 커다랗게 자리만 차지하면서 여기저기 자개가 떨어져 나간 찬장이 놓여 있었고, 근방 암자에서 얻어 온 달력만이 휑한 벽면에 걸려 있었다. 한쪽에는 누렇게 변색된 신문들이 쌓여 있었고, 그 옆에 서울 손님의 것인 듯한 커다란 가방이 놓여 있다.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가까이 다가가자 오래 묵은 고린내가 코를 찌른다. 책상 대신 쓰는 상에는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책갈피를 꽂고 구겨지는 것도 꺼려 하시는 아버지와는 달리, 사내는 책을 험하게 보는 편이었다. 군데 군데 접혀져 있었고 아래 위로 휘갈겨 쓴 글도 보였다.


네 귀퉁이가 낡게 헤진 사진이 꽂혀 있던 곳은 그 그림 위였다. 허연 수염을 기른 노인의 발 아래 신발이 벗겨진 채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낡고 추레한 남자의 등에는 노인의 커다란 손이 얹어져 있었다. 을씨년스럽게 변해 버린 은숙이네에 다녀온 어머니의 욕에 묻어나는 한숨 비슷한 늙은 노인의 눈과는 달리 그들을 바라보는 어둠 속의 남자는 새암이 많은 준식이처럼 밉살스러웠다. 그림의 틈새에 꽂힌 사진 속의 인물은 서울 손님과 혀를 길게 빼물고, 눈이 허옇게 뒤집혀 구멍에서는 온갖 오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은숙이네 막내 삼촌이 분명하였다. 사진 속의 은숙이네 막내 삼촌은 허옇게 버짐이 펴서 숭악스럽지도 않았고, 아이들이 돌을 던져도 머저리처럼 흐물흐물 웃기만 하던 동냥치가 아니었다. 눈이 부신지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수줍게 웃는 꼴이 은숙이보다 영 사삭스럽다. 은숙이네 막내 삼촌의 어깨에 손을 올린 서울손님도 입꼬리만 비트는 모양새가 아니라 눈꼬리가 함께 휘어 제법 잘난 사내답게 보였다.


누린내가 진동하는 다리 밑에서 새카맣게 그슬린 누렁이의 살점을 받아 먹고 있으면, 무지랭이 종놈이 자식 새끼들을 잘 둬서 기세등등하더니 종놈 팔자가 어디 가겠냐고 빨래터에서 수군거리곤 하였다.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던 종놈의 아들 하나는 서울에 공부하러 간 이듬해 병신이 되어서 돌아와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매달았다. 번듯한 읍내 농협에서 일 했다는 아들은 손에 익지 않은 농사를 짓다가 빚을 지고 배를 탔다는 소문만 떠돌았다. 마을 곗돈을 들고 밤도망에 나선 아들이 버리고 간 무지랭이 종놈 늙은이는 볼품없이 쪼그라 들어 눈꼽이 끼고, 누런 코를 흘리는 바보 천치에 똥오줌도 가리지 못한다. 기골이 장대하고 집채만한 황소를 번쩍 들었다는 종놈은 지린내를 풍기며 동리 조무래기들을 붙들고 우리 아이들은 어데 가불고 너희만 돌아 왔냐고 생떼를 부리곤 했다. 어쩐지 뒷목을 잡아채는 듯한 께름직함에 사진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어, 어매가 홍시 갖다 주라고... 방안에 들어 선 사내에게서 아무런 기척이 없어 고개를 들어보니 그제 대문가에서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비쩍 말라붙은 형상에 눈두덩이 퉁퉁 부어 올라 더욱 괴이쩍다. 어디 논두렁이에서 자빠졌는지 옷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고 양옆으로 길게 늘어진 손에서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다. 어머니가 들에 나가서 다행이지 들키면 반나절은 등쌀에 시달렸텐데 어디서 뭘 하고 왔길래 저런 꼬락서니인지 딱하다. 어디에 정신이 팔렸는지 상처를 닦을 생각도 않고 멀거니 서있기만 한다. 급하게 마른 수건에 물을 적셔 건네니 그제서야 거칠게 손을 닦아낸다.


낫을 빌릴 수 있을까? 어디서 괌이라도 지르고 왔는지 잔뜩 가라앉은 쇳소리로 묻는다. 헛간 모퉁이에 걸린 호미와 괭이, 낫의 날이 시퍼렇게 벼려 있다. 저 숭악한 얼굴로 무슨 일을 저지를 줄 몰라 볏짚에 단단히 묶인 날을 들고 사내를 뒤따랐다. 사내는 하나 밖에 없는 점방에 들러 소주를 사고 앞서 길을 잡았다. 집 없는 산길에 자리잡은 무덤가로 듬성듬성 가시덤불이 그악스럽게 자라나 있었다. 구더기가 들끓던 자리에는 풀쪼가리 하나 나지 않는다. 비스듬히 눕히지 않고 우악스럽게 위로 당기니 제대로 베일 리가 없다. 손잡이가 미끄러지고 말라붙은 상처에서 핏물이 새롭게 번진다.


아따, 이리 주씨요. 내가 할라요. 개망초가 하릴 없이 지천에 퍼지르고 앉아 있다. 뗏장을 입히지 못한 봉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는 거무틱틱한 흙 사이로 희게 자란 풀을 손바닥으로 느릿느릿 쓸어다 눕힌다. 그래야. 몸 깊은 곳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날 수 있는지 꺽꺽 울어 제끼는데 그 뒷모습이 지난 여름 제 새끼 모가지를 물어 주둥이로 삼킨 누렁이 같다.


뭐 땀시 그런다냐, 까닭 없는 배앓이로 끙끙대는 내 옆에서 어머니는 내 손끌부터 어깨까지 주물렀다가 문질러댔다. 그 날 새벽 사내는 떠났다. 뿌린 사람보다 맹근 사람이 워찌 죄가 더 많타요. 며칠 후 형사들이 들이닥쳐 온 집안 세간살이가 뒤집어지고 아버지가 끌려갔다. 내 유년의 끝자락이었다.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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