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매혹의 공포

매혹의 공포

미생(未生) 2015. 3. 25. 00:43

새벽녘이 다되어서야 귀가하는 녀석의 뒤를 말없이 따라 들어갔다. 아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찬이슬 맞으며 이 시간까지 싸돌아다니는 것인지,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것인지 형편없이 살이 내린 얼굴에 기가 막혔다. 비밀번호야 알고 있지만 장그래가 그런 말을 던진 이후 녀석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 평상시처럼 냉장고를 뒤져 맥주를 꺼내들어 바닥에 누워 티비를 볼 수 없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같이 짐승처럼 뒹굴고 싶다고 내뱉듯이 말하는 장그래의 눈은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자기혐오로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또 이러지, 녀석이 지나간 자리마다 자켓에 넥타이에 양말에 뱀허물이라도 벗는 양 옷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다. 그래도 구두는 얌전하게 벗어 방향을 바꾸어 놓았으니 기특하다. 자켓과 넥타이는 주름이 가지 않도록 반듯하게 펴서 옷장 안에 걸었다. 아, 쫌! 그렇게 말해도 녀석은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그대로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키며 자신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정리하는 나를 말없이 빤히 쳐다본다. 어랏, 잃어버린 줄 알았더니 여기 있었네. 잦은 세탁으로 슬슬 실밥도 풀어지기 시작했지만 워낙에 오랫동안 몸에 익어 버리지 못하고 아끼던 런닝복이 황송하게도 옷걸이에 걸려 있다. 아마 런닝화도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한바퀴 뛸까?

함께 누군가와 나란히 달리는 것은 섹스처럼 은밀한 스포츠다. 상대가 만족감을 느끼는 성감대와 감도를 탐색하는 것처럼 옆에서 달리는 상대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고 지면을 차고 올랐다 내딛는 리듬감을 찾아 맞춘다. 자극을 쫒아 깨어나는 모든 감각과 긴장하는 근육, 상승하는 혈압과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 점차 가파르고 얕아지는 호흡은 절정에 다다르는 과정을 함께하는 것처럼 자극적이고 친밀한 행위이다. 오르막길이 나오자 장그래는 조금씩 속도를 늦추었다. 충분히 앞서 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조금씩 처지는 나를 위해 보폭을 줄인다. 녀석이나 나나 대개의 대한민국 샐러리맨의 평균의 삶이 그렇듯 잦은 야근에 퐁당퐁당 이어지는 회식에 따로 규칙적으로 운동할 시간을 내는 것은 보통의 근성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쩐지 오기가 생겨 박차를 가했다. 이래도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학교 다닐 때부터 나보다 운동신경이 좋았던 녀석이다. 평소에는 말수도 적고 주변에 무심하며 무채색에 가까운 표정과 행동으로 다수의 평범한 그저그런 학생에 불과했던 녀석이 공만 잡으면 달라졌다. 불완전하게 중첩되어 있었던 장그래의 개체들이 그 순간 하나의 상태로 응축되어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장그래를 관찰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입자인 것 같기도 하고 파동 같기도 한 극도의 아름다움으로 지구의 위대한 과학자들을 혼돈에 빠트렸던 천상의 줄무늬처럼 장그래는 태초의 카오스처럼 고요하면서 무질서했다. 반듯하면서 도발을 꿈꾸었고, 신중했으나 결코 소심하지 않았고, 흐트러진 듯 단정했다. 그 무렵 나는 장그래와 친구가 되기로 했다. 이런 특별한 녀석은 나의 관심과 애정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공기를 들이 마시고 내뱉는 주기가 짧아지자 호흡이 흐트러지고 발바닥부터 허벅지까지 근육이 뜨겁게 팽창한다. 타박타박 어느샌가 나를 따라잡은 녀석은 나와 달리 호흡도 다리와 팔이 움직이는 속도도 제 리듬을 유지한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녀석의 안정적인 호흡 소리를 들으니 점차 나도 본래의 흐름을 찾을 수 있었다. 저만치 벤치가 보이자 장그래는 그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무릎에 양손을 짚고 숨을 골랐다. 기분좋은 통증과 쾌감이 몰려왔다. 언제 챙겼는지 물병을 건넨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냄새마저 올라오는 것 같던 차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절반쯤 마시고 다시 건네주자 내가 입을 대고 마셨던 부분에 그대로 입술을 대고 마시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와서 도망갈테면 도망가보라는 듯 명백한 도발을 담은 시선에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 보았다. 흐르는 땀으로 귀 아래 달라붙은 머리카락, 붉은 기가 도는 창백한 뺨과 목덜미, 땀에 젖은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나와 다르지 않은 단단한 남자의 몸. 도발은 네가 먼저 했어. 녀석을 그대로 벤치 위로 넘어뜨렸다. 원하는대로. 

공포의 포보스와 두려움의 데이모스와 한 배에서 태어난 에로스는 태생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나는 장그래를 사랑한다.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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