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Vanity

Vanity

미생(未生) 2015. 3. 22. 00:31

종이 울렸다. 씹는 둥 마는 둥 점심을 대충 입으로 쑤셔 넣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벌써 다른 녀석들이 골대를 차지한 채 시작하고 있었다. 잔디밭으로 뛰어들어가며 골 라인 밖으로 굴러나오는 공을 멀리 걷어냈다. 왔냐, 인원수 안맞았는데 다행이다. 상대팀 포워드는 4명이고 가운데에 있던 2명까지 가세해 골대 앞에서 진영을 갖추는데 수비진을 뚫고 옆으로 연결된 공을 높게 차올려 발리킥을 날리는 녀석이 있다. 장그래다.

콸콸콸 쏟아지는 수돗물 아래 머리통을 그대로 들이밀었다. 아, 살 것 같다. 티셔츠를 끌어 당겨 대충 물기만 제거 하고 안경을 쓰니 이제서야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숨을 고르는데 저만치 장그래가 걸어온다. 똑같이 흙먼지를 뒹굴었는데 누구는 역한 땀냄새에 비맞은 생쥐 꼴인데 혼자서만 멀쩡하다. 티셔츠 안쪽으로 안경을 꼼꼼하게 닦으며 어쩐지 다시 가빠지는 호흡을 골랐다. 예비 종소리에 운동장을 가득 채웠던 녀석들은 금세 교실 안으로 사라졌다.

운동장을 누빌 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5월의 햇살은 벌써부터 뜨거웠다. 오후에 비가 온다더니 비릿하게 올라오는 흙냄새가 거슬린다. 장그래는 손바닥에 물을 받아 얼굴을 쓱쓱 문지르더니 목이 탄지 흘러내리는 수돗물 아래 얼굴을 들이댄다. 쟤는 뭘 믿고 저렇게 느긋해. 대충 벗어두었던 교복 남방 단추를 급하게 채우다가 멈칫했다. 통통한 붉은 혀가 삼키지 못하고 입가로 흘러내리는 물을 훔치고 아래로 내리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잘게 진동한다. 뜨거운 햇살로 혈색 좋게 달아올랐던 뺨은 제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랫 입술에 매달린 물방울이 턱 밑으로 떨어지더니 목덜미를 훑고 저만치 아래로 사라진다. 티셔츠의 앞부분이 물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었다. 문득 감겼던 눈이 뜨여지고 새까만 눈이 올려다본다. 너무 빤히 보고 있었나. 다음 시간 수학인데 안가냐. 괜히 물에 푹 담가 납작하게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신경쓰였다. 아.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건지 똑같은 책상에 앉아 교과서만 바꿔서 놓으면 누구도 신경쓰지 않은데 그게 뭐 중요하냐는 것인지 애매하게 말끝을 흐린다. 괜히 심사가 뒤틀려 발길을 돌렸다.

저것들은 단체로 콧구멍이 막혔나. 새끼야, 창문 좀 열어. 여름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한바탕 땀을 쏟아낸 이후의 열기와 시큼한 땀냄새는 벌써부터 감당하기 벅찼다. 서랍 속의 교과서를 주섬주섬 꺼내는데 교실 뒷문으로 장그래가 들어왔다. 난처한 듯 미적미적 자리를 향해 걸어가던 장그래가 책상 위에 놓인 교과서를 발견하곤 멈칫 하더니 나를 쳐다본다. 칠칠맞긴. 수학은 교과서 없으면 지랄거리는 거 뻔히 알면서도 빌리는 것도 깜박했을 것이다. 쉬는 시간이면 연습장에 축구 경기 전략 짠다고 정신줄 놓고 다니더니, 그래도 교과서는 챙길 것이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더니 웃는다. 입꼬리만 끌어올려 엣다 어엿비 여겨 웃어주는 게 아니라 그 새까만 눈동자가 보이지 않도록 크고 환하게. 순간 아까의 적대심과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종례가 끝나자 책가방에 집어 넣어야 할 참고서와 문제집이 무엇인지 정리했다. 한국지리는 진도와 맞췄으니까 오늘은 가져갈 필요 없고 머릿속으로 부산히 확인하는데 누군가 옆 책상에 털썩 주저 앉는다. 아직도 안했냐며 눈으로만 힐난한다. 입도 벙긋 안하면서 재주도 좋다. 보나마나 시간표도 확인 안하고 서랍으로 사물함으로 되는대로 쑤셔박았을 것이다. 담임 심부름으로 수업 앞부분 필기를 놓쳐 장그래에게 공책을 빌려달랬더니 귀찮다는 듯이 눈썹 끝으로 자기 사물함을 가리켰다. 어디보자 29번이... 아니 어떻게 하면 저렇게 쌓을 수 있는데. 교과서와 참고서 사이로 대충 처박힌 단소며 붓이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아니 저 물건이 왜 저기 있는데 본래 저 색은 아니었을텐데 의심스러운 황갈색의 뭉쳐진 양말까지. 저 새끼는 얼굴만 멀끔하다.

아, 녀석이 곤란하다는 듯 작은 탄식을 흘린다. 오후에 비온단다 아침에 어머니가 내밀었던 우산을 책가방 귀퉁이에서 꺼내들어 장그래 옆으로 다가갔다. 계집애들처럼 팔짱을 낄 수도 없고 사내 녀석 둘이 쓰기에는 좀 작다.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걷다간 애써 우산을 챙겨온 보람도 없이 다 젖겠다. 어쩔 수 없지. 발도 빠르고 슈팅감각도 좋지만 나보다 키는 작은 장그래의 어깨를 잡고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어, 어. 아직 친하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집에는 항상 같이 가는 우리 사이에 또 이런 것은 어색한지 어깨를 빼려고 뒤트는데 약이 올라 더 강하게 잡아 당겼다. 나와 똑같은 딱딱한 어깨인데 한 팔에 안에 잡히는 것이 어쩐지 우쭐해졌다. 그닥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공만 차는 것 같은데 나와 별로 차이 나지 않게 성적이 좋은 녀석이니 나보다 하나라도 부족한 것은 있어야 공평하지. 비릿한 비냄새와 점심시간에 흘린 땀이 식어 주변의 공기가 들쩍지근했다. 코끝 아래 장그래의 머리카락 끝이 간질이는데 불쾌하지 않다. 장그래도 그럴까. 문득 나한테서 역한 냄새는 나지 않을까 신경이 쓰여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아, 왜. 이렇게 가까이 마주본 적이 있었나. 바짝 아래 위치한 장그래의 눈과 코, 입, 습한 공기가 불편한지 붉어진 귀까지 한 눈에 가득 들어와 어질어질했다.

따르릉. 우리는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종이 울릴 리가 없잖아. 눈을 뜨니 17세의 장그래는 사라졌고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알람소리였다. 벌써 7시 20분이다. 출근 준비를 서두르기 위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이불을 들추니 걸친 것이 없이 맨몸이다. 아, 어제 오랜만에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같이 집에 왔었지. 오늘은 조금 늑장을 부려도 되겠다 안도의 숨을 쉬다가 옆을 보니 여자의 매끈한 등이 보였다. 허리 아래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시트 끝은 한 손으로 쥐고 한쪽 팔은 머리를 받치고 요란한 알람소리에도 뒤척이지 않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여자를 깨우지 않고 일어날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대충 꿰었다. 쯔쯧 분명 이 꼴을 보면 녀석이 뭐라고 한소리 할텐데. 지난 밤 어지간히도 다급했는지 바닥에 아무렇게나 듬성듬성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협탁 위에 가지런히 개켜 놓았다. 분명 깔끔 떠는 녀석은 아닌데 내 방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어지럽혀 있는 것을 싫어했다.

차갑게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밑에 서자 이제서야 정신이 맑아진다. 왜 옛날 꿈을 꾸었을까. 아직 친해지기 전의 장그래는 불퉁스러운 데가 있었고 다른 녀석들에게 하는 것처럼 시시덕대지도 않았다. 아, 영업을 하러 나간 접대 장소에서 장그래를 보았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으면 도통 소식도 없고 녀석을 위해 어렵게 구한 축구 개막전 티켓에도 미지근한 반응이라 서운한 감정을 넘어 억울했던 차였다. 언제 담배를 시작했지. 두 손 사이에 끼워진 담배가 아슬아슬했고 지나치게 가깝게 마주 앉은 상대를 향해 대책없이 풀어진 웃음을 흘리는 게 못마땅했다. 내가 그 티켓을 구하려고 과장한테 가져다 바친 것이 얼만데 생색을 내려던 것도 잊고 안주도 없이 빈 속에 먹으면 탈난다고 한마디 하려고 다가가다 자리에서 멈추었다.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장그래 앞에 앉은 상대가 손을 내밀어 녀석의 턱을 느리게 당겼다. 아, 그러고보니 장그래 혼자가 아니였지. 상대는 장그래의 턱을 쓰다듬더니 목의 뒷부분과 어깨죽지 사이를 쓸어내렸다. 네가 개새끼냐 왜 가만히 있는데.

물을 잠그고 허리에 대충 수건을 두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새 여자가 일어났다. 잘 잤어요? 가지런히 개킨다고 했음에도 이미 구김을 간 옷을 걸치는 것은 불편할테니 여자가 입을만한 옷을 고르려고 서랍을 여는데 여자가 가까운데 닿는대로 티셔츠를 집어든다. 아, 그거 그래가 입는 거에요. 이거 입어요. 입성에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마음에 든 옷은 목이 늘어나고 소매 끝이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입는 녀석이었다. 녀석을 생각하니 어젯밤의 불쾌한 장면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여자가 내가 건네준 티셔츠를 입기 위해 풍성한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에 올리고 팔을 들어올렸다. 오목하게 패인 배꼽과 부드럽게 휘어지는 허리에 아랫도리가 저릿했다. 아침마다 좀 불편한테 여기에 내 여벌의 옷을 두면 어때요? 냉장고에 먹을 만한 것이 없는데 아침은 밖에 나가서 해결할까요? 여자는 느릿하게 가만히 쳐다볼 뿐 일부러 화제를 바꾸는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구김이 간 블라우스와 치마를 들고 욕실로 들어간 여자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협탁 위에 놓인 고무줄로 머리카락을 묶고 내가 준비한 커피 머그잔을 든다. 그래씨는 당신을 사랑해요. 지금 질투합니까? 똑똑하고 현명한 여자였다. 그래서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만약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할래요? 여자의 귀 아래로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엄지손가락으로 연한 살을 만지작거렸다. 그럴 리가. 우리는 서로를 잘 알잖아요. 스타킹을 신지 않은 여자의 맨다리를 내 다리 사이로 끌어당기며 봉긋한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이제 시작입니다. 오늘은 기필코 녀석을 만나야겠다.




무지의 진정한 특징은 허영과 자만 그리고 교만이다 - 제랄드 버틀러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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