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Death and Maiden

Death and Maiden

미생(未生) 2015. 3. 21. 03:35

남자를 끌어안은 어린 연인의 팔은 절망적으로 가늘었다. 다정스레 연인의 머리를 안고 있지만 사랑이 끝난 남자의 눈동자는 황폐했고 어린 연인은 남자의 식은 온기를 모른 척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까닭없이 사랑을 잃어버린 여자는 굳건한 다리로 소리없이 부서지는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 한 줌의 빛만이 허락된 문란하고 상스러운 남자의 공간에서 세속적인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둘만의 환희였고 사랑으로 탈피되었다. 검은 물을 맛보고 뒤틀린 나무들을 보고 싶고 사나운 바람을 느끼고 싶은 남자는 모든 세상 사람이 인정할 당당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연인을 만났고 그는 어린 연인의 사신이 되어 관계의 종말을 고했다. 검은 사신 앞에서 어린 연인의 빛나는 젊음과 싱그러운 아름다움은 퇴폐적이고 천박했다. 갈 곳을 잃은 사랑은 그다지도 초라했다. 


 


Death and Maiden



혈색 좋은 뺨과 희고 반듯한 이마.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청명한 목소리. 녀석의 여자는 수수한 듯 고요했고 아름다웠다. 경계 밖의 존재들에게는 너그럽고 친절했지만 녀석이 곁에 두는 사람을 고르는 데에는 무척 까다로웠다. 까다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주위에서 알아채는 것을 경계하니 녀석도 어지간하다. 그래서 이물없이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맥없는 웃음이 비져나왔다. 녀석과의 사사로운 일상을 나눠야 하는 그 특별한 사람은 누구일까. 무례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비껴간 시선 아래 긴장으로 말아쥔 손등이 보였다. 이 여자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시간 녀석은 어떤 낯빛을 하고 여자를 대할까. 내키는대로 만나서 밥먹고 술마시고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로 낄낄대며 세월을 축낸 나와 달리 연인의 이름으로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충만할 것이다.


딱히 모자라지도 잘나지도 않은 편한 녀석들이라고 어울리던 무리 사이에 그가 있었다. 능글능글 농을 치며 균형을 맞추던 다른 녀석들이 빠지면 녀석도 나도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낸 적이 없었으니 어색해지는 어쩐지 둘만 있기에는 불편한 사이. 저 녀석이 나에게 공을 패스하면 어쩐지 황송하게도 고맙게 느껴져서 나도 언제 공을 줄까 신경쓰느라 공격할 기회를 놓쳐버리기도 하는 마냥 허물없이 편하지만은 않은 사이. 공교롭게도 하교 후 집으로 가는 방향이 둘만 같았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걷다가 사거리가 나오면 툭 인사를 건냈다. 넌 몇 개 틀렸냐 오늘 나온 코다리 어제 그 찌게에 나왔던 생선 아니냐. 문학은 왜 과제가 그 따위냐. 무슨 소리야, 걸그룹은 애네가 최고지. 어슷하게 어깨를 맞대고 오가는 시간 감도는 침묵이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황망하게 세상을 저버린 아버지 장례식장에는 어머니의 찬 울음이 끊긴 듯 이어졌다. 발상을 하고 반우제를 지낼 때까지 남겨진 자에게는 이유가 있었고 슬픔을 느낄 여유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야, 밥먹자. 아버지를 잃은 사람은 나인데 나보다 더 생기없이 말라비틀어진 얼굴로 손을 끌어다 상 앞에 앉히는데 그제서야 비죽비죽 눈물이 나왔다. 아, 나는 그동안 울고 싶었구나. 울며 밥을 꾸역꾸역 삼키는 내동 내 손을 마주잡은 녀석의 손이 따스했다. 식어버린 몸에 온기가 돌았다. 나는 살아낼 것이다. 녀석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백기야, 만약 네가 누군가를 잃게된다면 그때는 내가 네 옆에 서 있고 싶어. 뱉어내지 못한 말을 식어버린 국물과 함께 삼켰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삶의 길목에 항상 녀석과 함께였다. 처음 태워주는 것이라며 운전면허를 따자마자 아버지의 차를 끌고나온 녀석은 길 한가운데에서 시동을 꺼뜨려버려 몇 십 년 동안 먹을 욕을 짧은 순간에 선물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에 불쑥 나타나 한쪽 구석에서 라면을 먹다가 제가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이 나온다면 갑자기 볼륨을 키우는 바람에 다른 손님들의 눈총을 받았다. 최저시급에도 못미치는 편의점 알바비였지만 생애 처음 내 손으로 번 돈으로 가장 먼저 산 것은 어머니와 녀석의 내의였다. 문득 내 곁에 녀석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애인도 생기고 언젠가는 가족도 생기겠지. 그렇지만 앞으로도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녀석이 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들었다.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꽤 괜찮은 친구인데. 그런 녀석이 하필 왜 특별해진 것일까. 친구라는 이름이 버겁다고 느껴질만큼 왜 절박해졌을까.

 
괜찮을 줄 알았다. 녀석이 같은 과 선배의 이름을 심심찮게 입에 올렸다. 새끼, 연애는 지 혼자 하나. 작작 좀 해라. 그렇게 꼴리면 고백하든가. 내가 보지 않으면 괜찮은 거였다. 보통의 남자들처럼 보통의 여자와 연애를 하는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그 남자가 장백기이고 하나로 단정하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내려 앉은 목덜미가 고운 여자와의 보통의 연애일 뿐이다. 영역 안의 내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녀석은 얼마나 여자를 살뜰히 보살필 것인가. 나와는 상관이 없어야 했다. 사랑이란 녀석과 여자처럼 빛나는 것이여야 하는데 왜 네 앞에서 내 사랑은 이렇게 가난해지는 것일까. 왜 나는 다른 사랑으로 빛나는 너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야 하는 걸까. 내 사랑이 이렇게 초라하다면, 그렇다면 내 사랑의 주인이 네가 아니라면 괜찮지 않을까. 다른 사랑에 헤퍼져도 되지 않을까.


나 아닌 누군가로 웃는 녀석을 보는 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즐겁지 않았다. 까다롭고 신중한 녀석인만큼 몇 번의 연애 밖에 하지 않으면서 그때마다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영 고약했다. 녀석의 경계안의 타인들 중에서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따위 친구가 뭐라고 나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거겠지. 난 내 인연들을 결코 녀석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울림이 좋은 음성에서, 희고 기다란 손가락에서, 서늘한 눈매를 덮은 안경에서 내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것을, 아직은 인정하지 않은 그것을 찾아내면 안되니까.


그래야, 내 이름이 저렇게 청승맞았나. 특별했다 여겼던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챈 순간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 자만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자의 단단한 심지가 보이는 단정한 눈이 불편했다. 여자는 녀석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어떤 소리를 내는지도 알겠지. 순간 치밀어오르는 질투로 욕지기가 올라왔다. 자신이 없어졌다. 녀석이나 나나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낼 정도로 주변머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사이의 특별한 그 무엇을 녀석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녀석의 여자와 함께 만난 자리가 끝나고 불쑥 집앞에 찾아와 그날의 만남과는 상관없는 일상을 늘어놓는 녀석을 보고 가슴이 뛰었고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나란 놈은 그렇게나 분별없이 미쳐 있었다. 내 욕심이었다. 아닌 척 숨기고 있는 그 언젠가에 대한 부질없는 희망은 시나브로 나를 지치게 했다. 나와의 어색한 만남으로 긴장한 여자의 손등을 가만히 덮은 녀석의 보기 좋은 손과 사나운 계절 식어버린 육개장을 넘기던 내가 체할라 등을 쓰다듬던 손이 겹쳤다.


뭐 별건가. 꼭 녀석이 아니어도 사랑은 가능했다. 그러나 녀석과 내가 단순히 통속적인 감정에 묶일 관계였나. 혼돈스러운 채로 내버려 둘 수 있는 것이지만 결단이 필요했다. 백기야, 네가 좋다. 너보면 너하고 하고 싶어. 순간 일그러지는 녀석의 표정이 통쾌했다.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녀석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만큼 고요하고 무심했던 녀석을 원망했다. 내일 결재 올릴 품의서 가격은 제대로 적었던가. 아차, 쓰레기봉투 사는 것을 또 깜박했네. 대중없이 내일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시작도 못하고 끝나버린 사랑은 시시하게 미련을 떨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늦은 밤 이른 새벽이 오기 전의 세상은 적요했다. 일상에 매달린 채 밀어두었던 감정과 기억이 스물스물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무심한 척 짧은 전화도 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서운할 줄이야. 환영일까, 푸른 빛이 감도는 새벽 공기 사이로 녀석이 서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천치처럼 사랑을 할 것이다. 백기야, 나는 너와 사랑을 할 것이다.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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