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내 남자의 남자

2년 전 거래처의 직원으로 만난 남자는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선과 표정, 손끝 동선 하나하나 철저하게 계산한 후 움직이는 듯한 남자는 가벼운 인삿말을 건네는 것조차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리 오랜 경력은 아니라고 들었건만 거시적인 안목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결단성과 군더더기 없는 영리한 일처리로 함께 작업하면서 상대방에게 기분좋은 경쟁심과 자극을 주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적당히 상대방을 자극하고 긴장시키는 남자는 동료로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몇 년 후에는 이 치열한 먹이사슬 구조 속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 부러우면서도 어쩐지 아니꼽기도 한 그런 사람

깔끔하게 고정시킨 머리카락부터 가벼운 유행을 쫒지도 추레하게 낡은 것도 아닌 오랜 기간 동안 그 옷을 입은 듯한 능숙함과 세렴됨이 배어 나오는 남자는 '거래처 직원' 이외의 범주를 허락하지 않는 듯한 깨고 싶지 않은 결계가 있었다. 그래서 의외였다. 남자가 만남을 요청해 온 것이. 알맞은 온도의 다정한 시선과 손길은 안전했다. 늦은 밤 통화에서 낮게 갈라진 목소리를 듣는 다거나 이른 새벽 열정으로 오롯이 나만을 담은 느슨해진 남자의 시선을 발견하는 것도 좋았다. 나는 그렇게 남자에게 익숙해졌다.

왜 그렇게 무모한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어떤 상황에서도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남자의 어조가 사나웠다. 그 녀석은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쉽지? 딱히 대거리를 바라지는 않는 듯 어느 누구에게라도 쏟아내고 싶었나보다. 똑똑하고 유능한 남자는 이럴 때면 세상사 굴곡을 모르는 천치같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쉬운 사랑은 없다. 아마도 웃는 게 해사한 남자의 친구인가 보다. 어떻게 남자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싶었을 정도로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쉽게 곁을 허락하지 않고 사적인 영역에 속하기 전까지 상대방을 숨막히게 하는 남자와 달리 남자의 친구는 선한 인상으로 온유함까지 자아냈다. 연인의 친구를 만나는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한 것은 나였다. 이 만남이 공식적인 관계로 인정되는 듯한 싫지 않은 압박감으로 탁자 위에 놓인 상대방의 정갈한 손톱과 새하얀 와이셔츠 깃 사이로 시선을 두었다. 백기 녀석 답답할 때 많지요? 문득 마주한 시선에 아득해졌다. 초봄 물빛을 받아 반짝이는 여물지 않은 여린 잎처럼 그 웃음이 청량했다

사실 남자의 친구를 직접 보기 전 이미 남자의 일상에서 때때로 출몰하는 '친구'의 흔적으로 익숙했다. , 내 친구 중에 이것을 못 먹는 녀석이 있어요. 술만 마시면 쓸데없이 잘 웃고 곤란하게 아무 데서나 곯아떨어지는 녀석이 있어요. , 그거 그 녀석이 입던 건데 다른 옷 줄게요. 파란 칫솔 그래가 쓰던 거예요. 맨 위 선반에 새 칫솔 있으니까 그거 써요. 아니요, 그래가 걸어놓은 시딘데 그냥 어쩌다보니 이것만 듣게 되네요. 남자의 공간에서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썩 유쾌하지 않은 상상이 들었지만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란다. 그래서 막상 남자의 친구를 만났을 때 낯설지 않았다. 언제나 친근하고 다정하게 남자가 부르는 이름으로 이미 어쩌면 지겹도록 남자의 친구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아직도 나는 다인씨인데 스스럼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가 참 생경했다.

그래야, 어쩐지 당황한 듯한 그럼에도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감정의 깊이를 담아 남자가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피식, 남자의 친구가 한쪽 입가만 올리며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렇게 환한 웃음을 짓던 사람이 저렇게 시린 표정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어쩐지 안타까웠다. 웃는 것일까, 우는 것일까. 착각이었나. 순간의 갑작스러운 변화로 내가 이 만남에 그렇게 긴장했나 마른 손바닥을 치마에 문질렀다. 주문했던 음식이 나오고 찰나와 같던 순간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그 관계가 쉽고 가벼운 것은 아닐 거예요. 괜한 오지랖이었나. 내 말에 남자가 당황한 듯 흘린 감정을 단정하게 갈무리한다. 필요와 분명한 동기로 인간관계를 맺는 남자에게 그 친구는 많은 점에서 의외성을 보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 친구라니 그런 변수가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알고 있나. 언제나 나를 편하게 만드는 적정 온도의 눈이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낯선 변화를 보인다는 것을. 그래서였다. 내가 먼저 남자의 친구를 묻거나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무언가 내가 모르는 그것을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보지 않는다면 거슬리는 그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 자만했다.

남자의 우선순위가 나일까 친구일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연인이었고 그는 허물없는 친구이니까. 이름이 규정하는 관계가 세월의 중량보다 우선하다고 생각할만큼 연애라는 것에 어리숙하지 않았지만 그 이름이 주는 통념적 안정성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불안하게 한 것은 내가 의지하고 편하다고 믿는 남자의 담백한 온도가 남자의 친구로 인해 심심치 않게 불안정한 온도차를 보이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몇 번의 불안정한 오류로 인해 앞으로는, 아니 당분간은 그런 변화가 달갑지 않은 나는 초조해졌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연인' 혹은 '친구'라는 관계로 명명하고 묶어두기에 감정의 갈래와 흐름은 제각각이었고 장백기라는 우수한 종자도 오류를 범하고 나또한 그 흐릿하고 농도짙게 질척거리는 관계에서 벗어나 방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천치들, 사랑이 뭐 별나다고 난리야. 눈앞의 감정도 인정하지 않는 병신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계절의 한 자락 어디선가 나는 어떤 사랑을 끊어냈다. 그런 어설픈 감정놀음을 되풀이 하기에는 피로했다. 그들을 방관하는 것도 귀찮았다. 뭐가 그렇게 특별하다고.

막연히 그 각별한 친구의 신발을 벗어놓는 방향부터 치약을 짜는 습관까지 나와 일일이 비교하다가는 지금의 평온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친구로 인해 내가 서운함을 느낄만큼 남자가 나에게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 나에게 충실했는가 마음껏 남자를 원망도 할 수 없게 얼굴을 보기 힘들 때에도 서로를 위한 잠깐의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함께 있는 시간에는 서로의 바쁜 일상으로 부족했던 시간과 감정만큼 상대를 배려했다. 이렇게 감정표현이 다채로운 사람이었나. 상사와의 관계나 은밀한 연애까지 친구의 자잘한 일상으로 일희일비하는 남자를 유별나면서도 사소한 것으로 치부했다.

함께 한 시간이 쌓여감에도 점점 더욱 말을 아끼고 조심스러운 행동거지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나를 출발선에 세워 놓고 저만치 물러서 있는 듯한 남자의 이기심과 비겁함에 슬슬 짜증이 났다. 친구와의 만남에서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내가 모르는 서로의 시간과 역사에 그들은 친절한 설명으로 끼워주려고 했다. 제 3자는 알 수 없는 서로의 어떤 시간을 둘만 공유하는 듯한 절대 어떤 존재도 끼어드는 것을 허용치 않는 그 내밀한 순간의 남자는 내가 익숙해진 장백기가 아닌 낯선 얼굴의 철저한 타인이었다. 내 불편함을 눈치 챈 것은 남자의 친구였다. 남자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초기의 몇 번을 제외하고 셋이 함께 만나는 자리는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극장에서 영화를 고르다가 식당에서 소스를 선택하다가 늦은 오후 함께 산책로를 걷다가 무심하게 남자는 친구를 이야기했다

옅은 알콜과 혼란스러운 담배 냄새로 알았다. 오늘은 그 친구를 만났구나. 아니, 어쩐지 짙어지는 남자의 한숨으로. 예측가능한 말과 행동으로 안전하다고 믿었기에 선택했던 남자의 그늘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언 손과 발을 녹이고 헤어진 감정을 기우며 쉬어가려 했던 나는 얼마나 오만했던가. 그래서 놀라지 않았다. 이건 당신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며 담담하게 이별을 고하는 남자가 어쩐지 수긍이 되기도 했다. 남자의 온도변화를 알아버린 나는 더 이상 그에게서 안전함을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나도 그들처럼.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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