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ShakespeaRe-Told : The Taming of the Shrew (2005, BBC)

SM커플의 정석적인 교본인 카트리나(Katherina)와 페트루치오(Petruchio)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로 계급과 성에 대한 폭력적인 농담으로 가득차 있다.
제목의 "Shrew"는 잔소리가 심하고 으르렁 거리는 여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쥐의 일종인 뾰족 뒤쥐를 나타내기도 한다. 입이 거하고 성질머리 고약한 악마 같은 여자를 길들이는 것은 덫을 놓고 사냥감을 포획한 후 주인에게 복종하도록 온순하게 길들이는 과정과 같다. 2005년 BBC에서 각색한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숨은 상징과 비틀린 농담들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이 희곡이 알려진 이래 각색되면서 반복되온 설정이지만 슬라이와 영주, 광대들의 커다란 틀은 무시되고 그 안의 이야기만 재생산된다. 성안의 영주가 되어 어여쁜 부인을 맞이하고 싶은 슬라이가 술에 취해 헤매는 꿈의 연속인지, 슬라이를 놀리기 위해 영주가 벌인 장난의 확장인지 알 수 없다. 화자의 꿈과 욕망의 실현이라는 겉가지를 잘라내고 청춘남녀들의 상투적인 밀고 당기기를 늘어 놓는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갖는 '내가 직접 겪거나 보고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다더라'는 안전망을 제거하고 소극에 불과한 꼭두각시 놀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계속되는 뻔한 오류이다.

카트리나와 비앙카는 교환되는 가문 재산의 일부로 취급되며 구혼자들은 지참금을 놓고 신부의 현물가치를 노골적으로 재단한다. BBC의 각색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을 꼽자면 바로 카트리나와 페트루치오의 이글거리는 첫대면과 페트루치오가 카트리나를 '채찍질'하기에 들어가는 결혼식 장면이다. 먼저 인물이 어떻게 다듬었는지 먼저 살펴보자면 카트리나(케이트)는 차기 야당 당수를 노리고 있으며 멀리는 총리까지 바라보는 전도유망한 정치가이다. 그러나 당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주위에서는 슬슬 '결혼'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
언니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결박까지 당했던 비앙카는 각색에서는 부와 미모를 겸비하고 독립적이며, 합리적으로 혼전계약을 요구하는데 어쩌면 카트리나의 분리된 자아로 보여진다. 국세청에 진 빚에 쫓겨 호주까지 달아난 페트루치오는 백작가의 후예라는 허울 좋은 이름만 있을 뿐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돈 많은 사람을 잡아야 한다. 그 사람이 여자이면 더 괜찮고. 르네상스 시대의 여자가 남자에게 대갈통을 갈겨버린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던 카트리나와 그에 못지 않은 성질머리를 지닌 허울좋은 한량 페트루치오의 첫만남을 BBC는 대사까지 충실하게 옮겨온다. 상대를 향해 독설을 퍼붓고 뺨을 올려 붙이는 대사 아래 들끓는 성적 에너지까지 두 배우의 좋은 연기와 호흡으로 더 빛을 발한다. 재미있는 사실, 이 두 배우는 이전에 BBC의 또 다른 드라마 <찰스 2세>에서 루퍼스 스웰은 찰스 2세 역을, 셜리 헨더슨은 찰스 2세의 수 많은 정부 중 하나였던 캐슬마인 백작부인에게 모욕까지 당했던 캐서린 여왕 역을 했었단다.

결혼식에서의 망나니짓으로 카트리나에게 모멸감을 안겨주었던 페트루치오, BBC에서 가장 재미있게 각색된 부분인데 페트루치오가 술을 마신 후 자신이 종종 여장을 즐기는 사실을 케이트에게 숨길 수 없어 결혼식에서 폭로하는 것으로 나온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슬라이라는 촌부가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 길에 쓰러져 잠든 것을 영주가 주워서 성으로 데려온 것으로 시작된다. 이 영주가 성질이 고약한 것이 슬라이를 놀리고 싶어서 자신의 시동중 하나를 시켜서 여장을 시킨 후 슬라이의 부인이라고 속이고 때마침 성에 들른 광대들을 데려다가 카트린느와 비앙카 자매의 이야기를 시키는 식으로 전개된다. 도입부의 성역할을 가지고 노는 것을 BBC에서는 페트루치오의 성정체성에 결합시킨 것이다.
후반에 페트루치오가 케이트의 보좌관에게 집적거리는 장면이나 케이트가 레즈비언이라고 놀림 당하는 장면을 보면 원래의 카트리나와 페트루치와의 관습적인 성역할을 뒤집은 것을 알 수 있다. 영주가 시동에게 여장을 시키는 당시로서는 해괴망측한 행동을 페트루치오에게 해학적으로 투사시킨 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인 살쾡이 길들이기에 돌입한다. 원전에서는 이 과정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묘사된다. 페트루치오는 카트리나 밥을 굶기고, 잠을 재우지 않고 언어적 폭력을 가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카트리나를 사랑해서라고 속삭인다. 이거, 매맞고 사는 여자들의 전형적인 이야기이다.
소극에서 뻔뻔스럽게 펼쳐지는 야만이 결혼과 부부관계에 대한 사회의 암묵적인 합의와 기대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몇백 년이 흐른 지금도 웃을 수가 없다. BBC에서는 성질급하고 에너지가 넘치며 종종 여장을 즐기는 이 남자가 '여섯 살배기" 철부지일 뿐이라며 에둘러서 핑계를 댄다. 그리고 결혼지참금의 우연적이고 부차적 결과뿐이었던 사랑의 주도권을 케이트에게 안겨준다. 케이트를 이탈리아의 외딴 별장에 고립시키고 가방도 잊어버리고 농땡이 치는 이 남자는 또 섹스로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 그러나 나한테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으면 이 가방 던져 버릴껴 으르렁거리는 하룻강아지를 향해 케이트는 먼저 자신이 이 황당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어른스럽게 인정하면서 원전의 주종관계와 같았던 수직적인 권력구도를 역전시킨 것이다. 말이 좋아서 역전이지 왜 이런 철부지 아이남자을 거두는 오지랖 넓은 모성이 사랑으로 포용되는지. 이제는 이런 폐습의 악순환을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런 땡깡은 엄마젖 떼면서 버릴 것이지 왜 부인한테까지 바라냐고.  

해를 달이라고 고집하고, 노인을 아가씨라고 우기는 페트루치오의 말이 맞다고 카트리나가 인정한 순간 아니, 이 여자가 드디어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졌구나 패배감을 느꼈던 것과 달리 알량한 자존심을 챙겨보려는 페트루치오의 억지를 받아주는 것이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화대를 치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사회·경제적 지위에서는 몹시 후달리지만 연애 경험도 없는 처녀(라고 들은) 케이트를 섹스로 우위에 서보려고 했던 페트루치오의 발악을 노련한 정치가답게 대응한다. 페트루치오의 폭력성과 가학성을 BBC에서는 맹수성을 내포한 성적 매력으로 순화시킨다. BBC의 각색은 아무리 좋게 돌려 말하려고 해도 대갓집 마나님과 힘깨나 쓰는 돌쇠의 야합으로 요약된다. 아니, 내세울 것은 힘 밖에 없는 돌쇠가 마님을 보쌈하는 모양새다. 이것은 전적으로 루퍼스 스웰에게 책임을 돌리면 된다.

다루기 힘든 맹수를 포획하면서 영광의 상처를 입었지만 주인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였다며 호기롭게 웃었던 페트루치오와 달리 능력있는 부인이 이혼을 요구할까봐 전전긍긍 하고 정치가 아내를 성실하게 외조하며 가끔 취미생활로 예쁘게 화장도 하고 망사스타킹에 구두도 신는, 사실상 케이트가 페트루치오를 거두어서 길들이는 것으로 그려진다. BBC 각색의 핵심은 성과 권력의 전복이다. 결혼지참금에 팔려가며 아버지와 남편에게 순종해야 했던 당시의 여자들과 달리 막돼먹은 폭언으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려고 했던 카트리나의 목소리를 거세하는 과정을 담은 '사냥감 길들이기'의 카트리나에게 목소리를 되돌려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케이트와 비앙카가 합쳐져야 비로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카트리나로 완성된다. 계급과 불평등을 사랑이라고 청승맞게 자위하며 그 폭력성에 길들어져 얌전하게 적응하는 부조리를 신랄하게 폭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환상만 파는 싸구려 신파보다는 훨씬 낫지 싶다.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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