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Of all base passions, fear is the most accursed (part 2/2)
CLASSIFICATION : Bonnie, Keller, Beecher
SPOILERS : 3#6, Cruel and Unusual Punishments / 6#8, Exeunt Omnes
DISCLAIMERS : They're not mine. So, what?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오스왈드 연방 교도소입니다."
어쩐지 받고 싶지 않은 전화였다. 얼마나 한다고 진작에 발신번호가 뜨는 전화기로 바꿀 것을, 왜 이다지도 나는 미련스러울까. 반년 전 독극물 사건으로 오스왈드의 죄수들이 다른 연방 교도소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도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애써 외면했다.
"워터슨 부인, 유감입니다. 확인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이곳으로 방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상하다. 남편이 이 탁자를 만든 지 아직 석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디 나사가 빠진 모양이다. 왜 이렇게 방정맞게 흔들리는 것일까. 바보같으니, 그러게 좀더 튼튼한 목재를 고를 것이지.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가지 못한 영혼들은 산 자들 옆에서 머물면서 기회를 노린단다. 그들이 기다리는 경계 근처에는 절대로 가면 안돼. 네 발목을 감아 쥐고 좋은 곳으로 어서 가자고 보챌 거야. 그리고 너를 데려가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 집어 넣고 그들은 축제를 벌일 것이야.'
귀가 먼 할머니는 어린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온전치 못한 발음으로 기이하게 눈을 빛냈다. 절대로, 절대로 그 길로 가면 안돼. 네가 가고 싶지 않다면 단호하게 돌아서야 해. 잔뜩 겁에 질린 내가 우악스럽게 울음을 터뜨려도 할머니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할머니는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며 음산하게 알 수 없는 말들을 읊조렸다. 심술 사나운 할머니, 언제나 일만 하고 가끔 나를 보더라도 화풀이만 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암팡진 옆집 계집애가 자랑하던 늘씬한 바비인형이 갖고 싶었다.
이곳에 처음 온 것이 삼년 전이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할머니의 섬뜩한 당부가 간질거렸다. 집에 돌아온 남편의 성치 못한 왼쪽 다리를 주무르고, 지난 일요일에 미처 풀지 못한 낱말 퍼즐을 함께 풀고 싶었다. 이렇게 간단한 단어도 모르냐고 퉁을 주어도 남편은 대거리도 하지 않고, 비슥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멀찌감치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뒷마당 차고로 가서 또 뭔가를 만들 것이었다. 남편은 쉴새 없이 손을 재게 놀렸다. 버스를 타고 중심가에 있는 제재소까지 1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수납장을 만든다든지, 정원의 화초를 다듬는다든지 좀처럼 쉬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에는 슬그머니 세심하게 다듬은 조각상을 내밀었다. 아기 사슴를 조심스럽게 내려다보는 엄마 사슴, 다른 동물이 다가올까 바짝 경계를 세운 아빠 사슴, 남편은 슬며시 눈길을 내린 채 초조하게 바지 주머니에 손만 문지르고 있었다. 참 착한 사람. 참 좋은 사람. 나에게는 참으로 넘치는 사람.
두달 만에 남자가 면회를 와 달라고 전화를 했을 때,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가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남편에게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전에도 남자가 예치금이나 필요한 물품을 말하면 나는 주저없이 넣어 주었다. 부부의 인연이 끝났어도 남자는 내가 보살펴 줘야 할 사람이었다. 보고 싶다는, 낮고 은밀한 속삭임에 열이 올라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를 가만히 손에 쥐었다가, 뺨에 문질렀다가 문을 쳐다보았다. 아직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눈물을 훔치는 중년의 여인과 거친 인상의 사내. 여인에게서 비투름하게 등을 돌리고 앉던 사내는 불쑥 소리를 높이더니 욕설과 함께 의자를 박차고 자리를 떠났다. 저렇게 떠나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인데. 기나긴 시간만이 놓여 있고,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는 사내는 죄책감으로 마음을 졸일 것이다. 서로 손을 꼭 잡고 이마와 코, 입술에 쉴새 없이 자잘한 입맞춤을 하는 두 사람. 아마도 부부나 연인일 것이다. 남자와 나는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남자였다.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그 몹쓸 눈이 보이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 둔부를 끌어당기며 깊은 입맞춤을 하였다. 언제나 이랬다. 남자는 나를 안는 것에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남자의 혀와 입술, 손이 주는 아찔한 감각에도 주위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상관이람. 이토록 잘난 남자가 나를 이렇게 원하는데. 투덕하고 길쭉한 코를 뺨에 부딪치고, 엉거주춤 손을 허리에 놓았다가, 허리 아래로 미끄러졌다가 주춤 놀라 어깨에 손을 내려놓던 남편을 애써 지웠다. 남자도 나만큼 그리웠던 것일까.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남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열정적인 손과 혀와는 달리 입술 끝만 비죽이 올려 웃는 남자의 눈은 차갑게 가라 앉아 있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재미있는 친구가 있어."
이곳이 견딜만 하냐는 질문에 남자는 즐겁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남자의 쓸데없는 오기인지, 정말로 나쁘지 않은 것인지 언제나처럼 남자의 말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를 철렁하게 만들었던 것은 찰나 스쳐갔던 열기 때문이었다. 무서운 이야기로 나를 겁에 질리게 하면서 오싹하게 눈을 빛냈던 할머니의 광기, 그것과 비슷하였다. 누구일까. 슬며시 못난 고개를 들이미는 질투보다도 궁금증이 먼저 일었다. 과연 어떤 사람이길래 이 남자는 이렇게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것일까. 이곳에 들어오기 전, 남자는 지독한 권태감에 빠져 있었다. 차라리 어떤 일이라도 생기기를 바라는 것처럼 지리멸렬한 일상에 지긋지긋해 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일정 기간 일하지 못하고 내키는대로 아무하고나 놀아나는 남자가 밉기도 했지만 나는 살아야 했다. 남자와 이혼한 후, 병원비가 아까워 진료받을 엄두도 내지 못했고, 무리하게 대출받은 주택융자금을 갚아야 했다. 모두 나 홀로 감당해야 했다. 누구도 덜어 낼 수 없었던 서로에 대한 부채감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와 다시 결혼을 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같이 견디어 왔다는 허울 뿐인 동지의식 뿐이었다. 그래도 남자는 내 옆에 있었으니.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그 부채감은 어떤 것으로도 상쇄될 수 없었고, 점차 감당할 수 없게 불어날 뿐이라는 것이었다. 한량없이 떠도는 남자를 잡을 생각도 않고, 저만치 쳐다보기만 했다. 당신도 나만큼 아파 봐.
남자와 나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초기의 만남과는 달리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온통 섹스 뿐이었다. 섹스로 가기 전의 유혹적인 전희, 서로를 정신없이 탐닉하는 섹스, 그 후의 나른함과 허탈함. 그래도 그 순간은 확실했다. 아, 이 남자와 내가 함께 살고 있구나. 거기에 만족했다. 더 이상 욕심내면 이것마저 사라지고 말테지.
알량한 육욕, 그리고 그 황량한 나머지를 비집고 자라는 의심과 불신, 원망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자만했다.
순간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난 이 남자와 왜 두 번이나 결혼을 했던 것일까. 숨이 가빴다. 남자를 사랑할 수 있도록 좀처럼 경계를 낮추지 않는 그 조심성이 지치게 만들었다. 나를 기다려 주지도 않고, 저만치 앞으로 달려가서 왜 따라 붙지 못하냐고 내 모자람을 책망하는 듯한 남자가 애가 탔다. 우리 둘다 미욱했다. 내 생채기만 크고 아프게 보였고, 알아 주지 않은 상대가 미웠다.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 받고나자 대화는 자주 끊겼다. 허탈했다. 이제 남자에게 나는 필요가 없었다. 나 역시 남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이 불편해지자, 지갑을 열어 지폐를 몇장 꺼냈다. 잘못 보았겠지. 순간 상처입은 듯한 남자의 눈을 무시하고 남자의 손에 억지로 돈을 쥐어 주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다짐과 함께. 이 사람은 그래도 누군가 보살펴 주어야 할 것이니, 그것만은 언제까지나 내가 하고 싶었다.
'추락사'
앞에 앉은 여자는 사건 현장의 사진과 증언과 검시 기록이 담긴 서류들을 들이 밀었다. 독극물 사건 때문에 사건의 경위를 밝히는 데 시간이 더뎌졌다고 한다.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증인이 있지만 당시 현장을 지켜봤던 다른 증인들의 진술로 타살로 마무리 되었다고 했다. 적당한 위로를 담고 여자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이 여자는 이런 일을 몇번이나 했던 것일까, 저렇게 안타깝게 쳐다보는데 나는 통곡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장례식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신기했다. 같이 살면서 이 사람은 한번도 자신의 빨래를 스스로 세탁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일이 밀려서 세탁을 하지 못하면, 며칠이고 같은 옷을 입었다. 땀과 기름냄새가 범벅이 되어도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하긴 벗고 있는 시간이 더 길었던 사람이니. 강한 비누 냄새가 묻어나는 개켜진 셔츠 귀퉁이만 만지작 댔다. 유류품이라고 해야 일회용 면도기와 양말 몇 켤레, 외설잡지 몇 권이 전부였다. 구멍 난 양말은 버릴 것이지, 우세스럽게 이게 뭐람.
"당신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그 남자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해요."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아금바금한 살림에 부담스러운 장례식 비용을 지불해 주겠다고 하는데 왜 고맙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남자가 교도소의 간수나 직원들과 친했을 리는 없다.
"토바이어스 비쳐라고, 크리스와 친했던 재소자예요. 그리고... 마지막에 크리스 옆에 가장 가까이 있었어요."
수녀라고 했던가. 지금까지 담담하게 사고와 절차를 설명해 주었던 친절한 여자의 눈에 연민과 안타까움, 그리고 억누른 분노가 엿보였다. 여자는 무슨 말인가 더 하려는가 싶더니 그만 두었다.
'재미있는 친구가 있어.'
선량해 보였다. 왜 이런 사람이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하긴 남자도 이곳에 있었지. 나 원, 참. 기껏 고생해서 장만해 주었더니 그 오토바이로 사고를 치다니. 수녀의 말이 맞다면 이 사람은 남자의 추락사 때문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고 했지. 나는 남자를 알았다. 그 남자가 다른 누군가의 손에 죽을 리가 없었다. 이 사람이 남자를 난간 끝으로 밀고 갔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 남자였으니까, 아마도 남자의 선택이었겠지.
이 사람이 나한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 맞은 편에 앉은 사내는 몹쓸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바로 들지 못했다. 바짝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따가워 보였다. 남자도 항상 머리카락을 짧게 다듬곤 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었지만 내 가슴께에 항상 머리를 올려 놓고 잠드는 남자여서 아침에는 그 부근이 불그스름했다. 사내는 빛을 받지 못해 핏기 없이 창백했다. 문을 들어설 때 잠깐 시선이 비껴간 것이 전부였다. 눈을 보고 싶었다. 당신은 괴롭나요? 울어야 하는 걸까요? 눈물이 나오나요? 나는 모르겠어요. 왜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아 있어야 하는지.
"당신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나는 당신에 관해서 들은 적이 없어요. 남자가 나에 관해서 뭐라고 하던가요? 남자가 사정하기 직전에 왼쪽 눈썹을 찡그린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요? 남자는 해마다 슈퍼볼을 놓치지 않고 녹화해요. 어린이 야구단의 야구공을 생일 때마다 몰래 만지작 거려요. 이마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상처는 열 일곱살 때 부랑자와 싸우다가 베인 거예요. 라드너에서의 일 때문에 악몽을 꾸는 것을 알았나요? 당신이 나보다 남자에 더 알고 있는 것이 뭔가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맥없이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불편하다는 듯이 의자에서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결심이라도 한 듯이 똑바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두터운 장막이 드리워졌던 남자와 달리 훤히 비쳤다. 그렇지만 단단했다.
"크리스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아요. 크리스를 보내기 전에 당신을 한번 보고 싶었어요."
사랑? 아기를 잃은 9월만 되면 여기저기 몸이 쑤셔요. 아직도 공원이나 학교 근처를 지나면 아이들이 새살거리는 소리에 가슴 속에 묵직한 돌이 들어앉은 마냥 답답해요. 그 돌이 부서질까 싶어서 앙가슴을 쳤더니 남편이 내 손을 잡고 나보다 아프게 우는 거예요. 숨이 타는 사람은 나인데, 왜 그 못난 사람이 더 서럽게 우는 건지 남편이 더 미워지는 거예요. 그깟 사랑 당신이나 지고 가요. 신물이 나요. 싫어요, 난 그만 할 거예요.
"난 이제 이곳을 나갈 수 없어요. 아이들을 만날 수도 없지요."
사내는 입에 대지 않고 만지작거리던 자판기 커피캔을 탁자에 바로 세워두었다. 크리스, 당신은 정말 잔인해.
"크리스는 누구와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처음으로 사내가 웃었다. 저것도 웃음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내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다. 참으로 선량해 보였다. 이전의 불편한 침묵과는 달리 한결 편해졌다. 아, 이런 사람이었구나. 당신이 사랑한 사람이. 그런데 당신과는 너무나 많이 다르잖아. 당신도 이 사람을 사랑하면서 나만큼 외로웠을까. 참으로 몹쓸 것이지, 사랑이라는 것은.
남편은 낡은 소파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이런, 이렇게 자고 일어나면 다리가 저릴 텐데. 그렇지만 곤한 표정을 보니 차마 깨울 수가 없어서 담요만 끌어다가 살며시 덮어 주었다. 가슴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손을 끌어당겨 두 손으로 살그머니 감쌌다. 따뜻했다. 가만히 남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크리스, 나는 울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