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mnem dimittite spem, o vos intrantes :: Of all base passions, fear is the most accursed (Part 1/2)

TITLE : Of all base passions, fear is the most accursed (part 1/2)
CLASSIFICATION : Bonnie, Keller
DISCLAIMERS : I know, I konw.



뜻밖이었다. 면회를 와 달라고 남자가 전화를 한 것은.

두달 전 결혼 소식을 알리고 난 후, 드디어 이 남자와 나의 인연은 모두 끝이 난 것이라고 믿었다. 두 번째로 이혼을 하고 난 이후에도 남자와 나는 종종 만났다. 설령 더 이상 부부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좋은 친구였다. 시청에서 작성해 준 뻣뻣한 종이 쪼가리에 묶여 있던 시간보다는, 어느 순간 기억이 나면 서로를 찾고 끈적거리는 체액과 짜부라진 콘돔만 남겨둔 채 남자에게 미련이 없는 척, 담백한 척 돌아설 수 있는 적당한 관계가 편했다.

남자와 결혼을 유지했던 시간 동안, 날마다 가게로 찾아오는 신경질적인 노파의 버릇없고 시끄러운 이웃들에 관한 끝없는 험담을 들을 때에도 내 마음 한 자락은 언제나 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며칠 전 식당에서 남자와 수치심도 모르고 지분거리던 웨이트리스가 전화번호를 주었을까, 내 안을 파고들며 귓가에 부질없는 약속을 속삭일 때에도 그 여자들의 마른 허리와 다리와 비교하지는 않았을까, 남자가 아침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신문 귀퉁이에 나 있던 광고 전화번호가 몇번이었더라. 외판원의 말만 듣고 산 약보다는 그래도 병원이 낫지 않을까. 토하기도 지친다고.
아니야, 이번 달에는 남자가 가지고 싶어하던 오토바이를 사줄 생각이었는데 이 돈을 쓸 수는 없지. 심란한 상념은 길을 찾지 못하고 끝간 데 없이 이어졌다. 사랑이라고 애써 둘러씌우고 싶었던 그 집착이 참으로 지긋지긋했다.

욕실 서랍장 한 구석에 처박힌 콘돔은 기한을 넘긴 지 이미 오래였다. 이 남자를 원하는 다른 마르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두고 왜 나일까. 이 남자가 나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주책없는 설레임보다는 의심이 먼저였다.
졸업을 몇 달 앞둔 열일 곱, 라커룸에 쪽지가 꽂혀 있던 그날도 그랬다. 계속해서 나를 지켜봐왔다는, 만나고 싶다는 속삭임에 홀려 그날 밤 축구장으로 갔었다. 혹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녀가지는 않을까. 내가 가진 가장 좋은 드레스를 입고, 귀가 먼 할머니의 진주 귀걸이를 몰래 하고 앉지도 못하고 아홉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날 스페인어 수업 시간 칠판에 커다랗게 확대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살이 비집고 튀어나올 것 같은 시뻘건 푸대자루 같은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뚱뚱한 여자가 추위에 얼굴이 퍼렇게 얼어붙어, 시커먼 마스카라는 흉칙하게 번져 있었다. 사진 아래는 낙서들이 적혀 있었다. 어떤 녀석이 여자친구와 헤어져서 몇달 동안 못했다고 하던데 연락처 알려줄까? 그런데 비계에 묻혀서 네 거기는 찾을 수 있을까? 웃음이 나왔다. 철자가 틀렸다. 바보들 같으니, 이깟 꼴같지 않은 낙서를 하면서도 제대로 못 쓰다니. 그런데 저 사진 속의 얼간이는 왜 저렇게 울었을까.
설마, 이 멍청이는 정말로 사랑에라도 빠질 줄 알았을까. 저 외모에? 우스워라.

남자는 내가 일하는 가게에 종종 찾아 왔었다. 우유보다는 오렌지 주스를 좋아하고, 대부분의 미혼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손이 덜 가는 편리한 정크푸드를 고집했고, 어쩔 때는 치수에 맞지 않은 속옷을 사가곤 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에는 남자의 이름과 이 가게에서 두 블록 아래에 있는 정비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 의미없는 농담을 주고 받기 시작했을 무렵 남자가 데이트를 신청했다. 나쁠 것은 없었다. 설령 하룻밤에 그칠 지라도 웅얼거리는 티비소리만 메아리 치는 빈 아파트보다 나을 것이었다. 눈을 마주치고 시덥지 않은 이야기라도 늘어 놓을 수 있는, 손을 내밀어 만질 수 있는,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나와 같은 온도의 사람의 체온이 그리웠다.

남자와의 이야기는 의외로 즐거웠다. 날카롭지만 결코 넘치지 않는 냉소적인 유머감각과 끊기지 않고 여러 가지 주제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는 편안함은 어느 순간 남자에 대한 경계를 늦추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저 알 수 없는 막연한 눈도, 어느 사이엔가 내 팔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기계와 기름을 만지는 사내답지 않은 저 곱상한 손도, 칠년 동안 무수히 드나들었던 아파트의 열쇠를 제대로 꽂지 못하는 내 뒤에 서있는 남자의 온기도 아득하기만 했다.

앨비스의 증인이 필요하다면서 라스베가스로 가자고 고집했을 때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십자가 문신을 새길 때도, 내 위에서 자신이 신이라고 외쳐댔을 때도 남자는 나에게 어미 잃은 비 맞은 새새끼와 같았다. 앙상한 나무 꼭대기 둥지 안에 이제 더 이상 먹이를 물어다 줄 어미도, 일렬로 붙어 앉아 체온을 나누던 형제도 잃은 홀로 남겨진 새새끼. 남자도 나와 같이 지독히도 외로웠던 것이다. 그래, 당신이 신이라면 내가 그 신을 모시는 그 커다란 텅 빈 신전을 지켜줄게. 내가 당신을 위해 줄게. 내가 안아 줄게. 그러니까 그만 울어. 쉬.

한 페이지 이상을 읽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남자는 머리맡에 항상 값비싼 표지의 성경을 놓아 두었다. 쉴새 없이 내 몸을 탐하면서도 잠이 들기 전에는 성경을 손끝으로 다정하게 쓸어 내렸다. 방금 전 나누었던 열기와 다정함을 그대로 담아 소중한 연인을 대하듯이 정성스럽게 말이다. 섹스를 하는 것과는 별개로 옆에서 누군가 잠드는 것에 익숙해 지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잠결에 들리는 남자가 화장실을 드나들며 물을 내리는 소리도 거슬렸고, 아침에 올려져 있는 변기 뚜껑을 내리는 것도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티비 리모콘이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손에서 꼭 쥐고 놓지 않으려는 고집도, 컵이 아니라 병째로 물을 마시는 성가신 습관도, 거기에 너그러워지면서 점차 나는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무엇이 그리 허한 것인지 항상 내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새벽녘 악몽으로 몸서리를 칠 때에는 한참을 남자의 머리와 등허리을 쓸어 주어야 했다. 남자가 원하는 것을 내가 채워 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우리도 외롭지 않을 텐데. 이 남자가 부족한 나를 선택했다는 기쁨으로 오만했던 나는 그때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남자를 온전하게 만들어 줄, 비어 있는 어떤 것도 아예 없었다는 것을 그때는 나도, 남자도 알지 못했다.

같이 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연락도 없이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 일찍 교대를 해야 했지만 걱정과 초조함으로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며칠 전에 불량한 사내와 다툼이 있었다고 했는데 혹시 그 사람이 남자에게 해코지를 한 것은 아닐까,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이 오토바이를 사줄 것인데. 불안함에 창문 밖을 서성이다가 안되겠다 싶어 문 밖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동이 터 올 무렵에야 늘어진 몸을 이끌고 집안으로 돌아와 의자에서 까무룩 잠이 드나 싶었더니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보다 먼저 끼쳐온 것은 독한 술과 찌든 담배, 불쾌한 짙은 향수, 그리고 감추어 지지 않은 질척한 섹스 냄새였다. 믿을 수 없다는 분노도 잠시,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들었다. 그래 이렇게 잘난 남자가 나에게 만족할 리가 없지. 그렇지만 남자가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되었다. 어정쩡하게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나는 웃었던가, 울었던가.

이후에도 남자는 다른 여자들과 지분대는 것을 내 앞에서도 감추지 않았다. 옆에 앉은 내 목덜미를 쓸어 내리면서도 가슴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이제 막 십대를 벗어난 듯한 여자아이와 음탕한 농담을 해댔다. 어울리지 않게 토끼가 그려진 앞치마라니. 칠칠치 못하게 소스자국을 묻힐 것은 뭐람.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흔들며 돌아가는 여자 아이의 뒷모습을 남자는 노골적으로 쳐다보다가 나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고 시위하는 듯한 남자의 만용은 어리석었다.

남자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에 있는 근처 대학가의 어린 남자들과도 의심쩍은 알 수 없는 손길과 눈빛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남자와 나 사이에 겹겹이 놓인 팽팽한 긴장과 이어지는 거친 섹스. 만약 남자가 그들에게서 원한 것이 단순한 쾌감 뿐이라면 상관 없었다. 건장한 남자의 몸에 숨은 겁에 질린 어린 아이를 달래 주고 품어주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라면 남자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여자든 남자든 누구든 상관없이 발가벗고 뒹굴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로.

남자의 몸에서 배어 나오던 싸구려 화장품 냄새와 남자는 사용하지 않는 면도로션 냄새가 옅어질 무렵, 남자는 나에게 청혼을 하였다. 자신과 같은 쓰레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그래, 이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잖아. 설령 그것이 거짓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다부진 남자의 허리 치수 두배가 넘는 내 바지가 편하다고 허리끈을 졸라매고 거리낌 없이 밖에서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으니. 커다란 몸집에 아이처럼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나를 비웃지 않고, 마을의 가게를 전부 뒤져 최근에 나온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오는 사람이었으니.

못되게 굴려고 하지만 남자의 어쩔 수 없는 작은 배려도 그러나 아이를 유산했을 때는 나를 달래 주지는 못했다. 아이가 생긴다면 남자와 나의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거리를 메울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으니, 이런 벌을 받아도 당연했다. 그러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떠나버린 내 아가는 어쩌나. 어제만해도 나 여기 있다고, 작은 발을 꼬물거리던 씩씩한 녀석이었는데. 마른 눈물도 쓰게 삼켜버린 다음 날, 나는 남자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래도 이 남자가 알아야 할 텐데, 내가 남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가여운 사람이 알아야 할 텐데.

Posted by 흰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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